불 질러 가족 살해, 거짓 통곡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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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진로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을 빚던 중학교 2학년생이 앙심을 품고 집에 불을 질러 잠자던 일가족 4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서울 성동경찰서에 따르면 21일 오전 3시35분쯤 성북구 모중학교 2학년생 이모(14)군이 성동구 하왕십리동 자신의 13층 아파트에서 미리 준비한 휘발유를 집 안에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길은 삽시간에 번져 잠을 자던 아버지 이모(46)씨와 어머니 최모(38)씨, 여동생(9), 할머니 박모(71)씨가 모두 목숨을 잃었다.

 범행 직후 집을 나간 이군은 1시간30분 뒤 아파트로 돌아왔다. 이군은 태연히 경비원에게 “몇 호에서 불이 났느냐”고 물었다. 그는 경비원으로부터 자신의 집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어머니를 찾기도 했다. 이군은 처음엔 경찰에게 “홍대에서 놀다가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군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나고, 머리가 불에 그을린 점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이군을 추궁, 범죄 사실을 자백받았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평소 춤을 추거나 사진을 찍는 데 관심이 많아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판·검사가 되라며 욕설을 하고 폭행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는 사건 전날 밤에도 아버지와 크게 말다툼을 벌였다고 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군은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19일 저녁 인근 상가에서 10L들이 물통을 구입했다. 이어 인근 주유소에서 “학교 과학시간에 필요하다”며 휘발유 8.5L를 샀다. 이군은 구입한 휘발유를 배낭에 넣고 귀가한 뒤 자신의 방에 숨겨놓았다. 그리고 범행 당일 아버지가 잠든 안방, 어머니·동생이 잠든 거실, 할머니가 잠든 작은방에 차례로 휘발유를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는 폐쇄회로TV(CCTV)에 찍히지 않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으로 빠져나갔다. 이군은 범행에 사용한 휘발유통을 아파트 계단에 버렸다. 입고 있던 점퍼에서 기름 냄새가 나자 이를 길에 있던 노숙인에게 주기도 했다.

 이군은 “반성하고 있다. 내 생각이 짧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버지 외) 다른 가족은 구할 계획이었으나 불이 갑자기 번져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와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또 “내 이름이나 사생활 등 개인정보는 (신문이나 방송에) 안 내줬으면 좋겠다”고 기자들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경찰은 이군을 존속살해 혐의로 서울가정법원 소년부에 송치할 계획이다.

만 13세인 이군은 형사 미성년자(만 14세 미만)에 해당돼 형사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

송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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