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가마 대신 혼자 한 사람 옮기는 인력거 등장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20세기 초의 인력거. 챙이 좁은 갓을 쓴 젊은이는 인력거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웃고 있는데, 중절모를 쓴 길가의 청년이 아니꼬운 듯 쳐다보고 있다. 목적지에 빨리 도달할 양이면 직접 걷는 것이 나았을 테지만, 이 승객은 남을 ‘부리는’ 지위를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서양인이 본 조선]

옛말에 ‘금강산 중 노릇’이라는 것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강원도 관찰사가 새로 부임하면 으레 금강산 구경에 나서는데, 물론 걸어가지는 않았다. 험한 산길에서 관찰사 영감의 가마를 평범한 가마꾼들에게 맡겼다가 자칫 실족이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 그 일에는 아무래도 숙달되고 요령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 일을 전담한 이들이 ‘금강산 중’들이었다.

 19세기 말까지 가마는 신분을 표시하는 대표적 수단이었다. 신분에 따라 탈 수 있는 가마가 정해져 있었고, 부릴 수 있는 가마꾼의 수도 달랐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갑작스럽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가마 타는 풍습이 사라져 가마는 혼례 등의 특별한 행사 때에나 쓰는 물건이 됐다. 인력거가 새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1869년 일본에서 처음 개발된 인력거가 이 땅에 첫선을 보인 것은 1883년이었다. 그해 12월 미국인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이 조선 정부 초청으로 입국하면서 인력거 두 대를 가져왔는데, 길이 나빴던 데다 인력거를 몰 줄 아는 사람도 없어 금세 망가졌다. 인력거가 다시 등장한 것은 청일전쟁 중인 1894년이었다. 하나야마(花山)라는 일본인이 인력거 10대를 들여와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개시했다. 1895년 가을부터는 서울에서 대대적인 도로 개수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그 덕에 인력거는 꽤 안락한 탈것이 됐고, 바로 한국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1899년 2월 21일 궁내부대신 이재순과 군부대신 민병석이 가마 대신 인력거를 타고 등청했다. 민병석은 의아해 하는 부하 장교들에게 “새 복장(양복)에는 인력거가 좋으니 앞으로 자네들도 다 타고 다녀라”고 권했다. 인력거는 가마처럼 종류도 많지 않았고, 당장 국내에서 제작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돈 내는 사람이면 다 태웠다. 처음에는 인력거도 가마처럼 승객의 ‘위세’를 돋우는 탈것이었으나 전차와 자동차가 등장하자 이들과 경쟁하는 ‘교통수단’의 기능이 부가됐다. 인력거꾼은 사람을 태운 수레를 끌고 빨리 달려야 했을뿐더러 젊은 기생이든 어린 학생이든 부르기만 하면 ‘예’하고 대령해야 했다. 몸도 고되고 자존심도 상하는 직업이어서 일제 강점기에는 ‘천한 직업’의 대표격이었다.

 가마꾼도 인력거꾼도 없는 시대지만 ‘높은 분’들을 위해 별 필요도 없는 일을 만드는 풍조가 아주 사라졌다고 하기는 어렵다. ‘위세의 거품’을 깨끗이 걷어내는 것은 선진화를 위해서나 공정 사회를 위해서나 꼭 필요한 일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