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대중외교의 틀, 근본적으로 다시 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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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북한이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하면서 후계체제를 공식화하자 중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회담하는 사진에 ‘대를 이어 전하자(世代相傳)’는 글귀를 새긴 접시를 김정은에게 선물한 것이다. 국제사회에 향후 중국의 대(對)북한 정책의 방향과 원칙을 알린 신호탄이다. 이로써 ‘중국이 책임 있는 대국으로서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개혁개방을 둘러싼 양국 간 갈등이 심각하다’는 등의 희망적 예단들은 당분간 수면 아래로 들어갈 전망이다. 더구나 중국의 외교정책은 한번 결정된 것은 잘 변하지 않은 데다 중국이 북한 핵실험 이후 대(對)북한 정책의 성과와 한계를 학습했다는 점에서 이런 기조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북한도 중국에 호응하고 나섰다. 우선 당대표자대회를 열어 정치과정을 제도화해 ‘유훈통치’ 방식을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한계는 명확하지만 변화하는 현실을 어떤 형식으로든 반영하기 위해 당규약을 수정했다. 이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지난 5월 방중 당시 후진타오 주석이 ‘치당치국(治黨治國)’의 경험을 소통하자고 제의한 것에 대한 화답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양국은 국경지역에서 경제협력을 본격화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도가 놓이고 항구가 열리고 있다. 곧 동북지역의 초국가적 경제협력이 한반도를 타고 내려올 태세다.

이러한 변화의 와중에 김정은 당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은 이번 주 폐회될 중국 공산당 17기 5중전회에서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큰 시진핑 국가부주석의 파트너가 될 전망이다. 이미 시진핑은 2008년 차세대 지도자가 된 이후 첫 해외 순방지로 북한을 방문,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피로 뭉친(鮮血凝成) 우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양국 새로운 지도부들의 소통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중국의 새로운 대외전략은 짧게는 동북아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권력변화가 나타나는 2012년 대전환기를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길게 보면 국제문제에서 ‘국제관계의 민주화’를 목표로 독자적 중국 외교모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천안함 사태, 중·일 분쟁, 환율갈등, 기후변화 문제 등에서 보인 중국의 태도는 이러한 변화의 상징들이다. 앞으로도 많은 문제가 이러한 경로를 따라 처리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對)중국 정책의 좌표를 정확하게 설정하지 못한다면 격랑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북·중 사이의 간격을 벌려 북한을 변화시키겠다는 미련은 버려야 한다. 한·미 동맹을 강화할수록 중국이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재확인할 것이라는 기대도 접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하지 않는다는 민주평화론이나 미국발 ‘중국위협론’을 중국에 적용해온 타성도 성찰해야 한다. 남북관계의 교착이 한·중 간 ‘전략관계’를 내실화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한·중 간 인식차이는 확대돼 자칫하면 프레임으로 고착될 지경에 놓여 있다. 이것이 양국 관계의 현실이라는 점을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성찰의 칼날 위에 올라서야 새로운 전략이 나온다. 우선 조직과 인력을 보강하고 공공외교를 확산하는 등 대(對)중국 외교역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중국위협’을 만들어 한·미 동맹에 편승하려는 파벌모델을 ‘성과 있는 곳에 보상 있는’ 업적(performance) 모델로 바꿔야 한다. 대(對)중국 정책아이디어는 따로 수소문할 필요가 없다. 창고를 열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만들어 낸 유용한 정책보고서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기다리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책결정자들이 중국 부상에 대해 인식을 일신하고 실천의지를 가다듬어야 하며, 중국의 전략적 가치를 이해하는 정치력 있는 참모를 가까운 거리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 힘이 실린다.

대(對)중국 무역의존도가 25%에 달하고, 무역흑자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얻고 있으며, 오늘 서울에서 김장파동이 나면 내일 중국에서 배추를 들여와야 하는 현실에서 ‘연미통중(聯美通中)’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중국과 거리 두기를 시도할 만큼 우리의 처지가 한가롭지 않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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