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방 폐인' 늘어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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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서울에 사는 조모(20)씨는 최근 3년간 집 밖을 나선 적이 없다.

자신의 방에 틀어 박혀 잠을 자거나 인터넷을 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화장실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방에서 나오는 일도 거의 없다. 중학교 때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던 조씨의 '은둔 생활'은 성적 부진에 따른 스트레스에서 비롯됐다.

2002년 한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기말고사에서 전교 100등 밖으로 밀려나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조씨는 그때부터 아예 등교를 거부하고 커튼까지 내린 채 자신의 방에서만 생활을 하고 있다.

조씨의 사례처럼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거부한 채 밀폐된 공간에 집착하는 '히키코모리(引籠.구석방 폐인)족'이 늘고 있다.

히키코모리는 '틀어박힘'이란 뜻의 일본말로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일본 후생성은 "전체인구 중 1%가량인 120만여명이 히키코모리족으로 추산된다"면서 "일부는 집 밖으로 나와 살인이나 방화 등의 범죄를 저지르기도 해 일본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5일 일본의 한 도시에서 한살배기 영아를 살해한 30대 남성도 히키코모리족인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우리나라에서도 학교 교육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경기침체의 장기화로 실업자가 늘면서 일본의 경우와 비슷한 '구석방 폐인족'현상을 보이는 사람이 늘고 있다.

서울대를 졸업한 김모(29)씨는 사법고시에 세 차례 낙방하고 취직에도 실패하자 구석방 폐인이 돼 버렸다. 2년 전부터 3평짜리의 고시방에 틀어박혀 낮에는 자고 밤새도록 인터넷만 하고 있는 것이다. 식사는 주로 컵라면으로 해결하고, 담배를 사러 잠깐 나가는 것이 외출의 전부다. 김씨는 결국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최근 정신병원을 찾았다.

2003년 구석방 폐인증세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서울 동남정신과의원에서 진료한 3236명의 환자 중 3% 정도인 107명이 이 같은 증상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00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라는 것이 병원 측의 설명이다.

이 병원 여인종 원장은 "국내에 최소 1000여명의 구석방 폐인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이들은 절망이나 자책감에 휩싸여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거나 고함을 지르고,심할 경우 가족들을 폭행하는 등의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2m가량의 큰 키에 심한 입냄새로 학교에서 놀림을 받다가 자퇴한 박모(19)군은 최근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어머니와 누나 등을 상습적으로 폭행해 치료를 받기도 했다. 구석방 폐인족들은 장기간 방 안에서만 지내다보니 우울증이 생기고 자살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17일 서울 잠실동의 한 모텔에서 여성 세 명과 음독 자살한 이모(30)씨도 1996년 군대에서 제대한 뒤 특별한 직업 없이 지내면서 인터넷을 통해 자살사이트만 집중적으로 찾았던 것으로 경찰조사 결과 밝혀졌다.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 이시형 소장은 "부모의 과잉 보호, 학력지상주의, 보편화된 인터넷 등으로 인해 구석방 폐인족이 늘고 있다"면서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기간이 3개월을 넘으면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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