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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달리다 거꾸로 뛴 한국 육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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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남자 100m 한국기록 보유자 김국영. [중앙포토]

한국 육상의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다. 12일 끝난 전국체육대회에서 기대를 모았던 단거리 기록이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다음 달 광저우 아시안게임과 내년 8월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비상이 걸렸다.

가장 충격적인 건 남자 100m 한국기록 보유자 김국영(19·안양시청)과 400m 최강자 박봉고(19·구미시청)의 부진이었다. 둘은 대한육상경기연맹이 기획한 ‘드림 프로젝트’에 따라 지난여름 미국에서 두 달간 훈련했다. 그러나 첫 시험무대였던 체전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김국영은 남자 100m 결선에서 10초54로 3위에 그쳤다. 박봉고는 400m에서 46초57로 1위에 올랐지만 자신의 기록(45초63)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벅지 근육이 찢어져 아시안게임 출전이 무산됐다.

다수 육상 관계자들은 ‘미국에 다녀왔으니 성적을 내야 한다’는 연맹 고위 인사와 주변의 압박이 이들의 부진과 부상을 부추겼다고 입을 모은다. 강태석 안양시청 감독은 “연맹은 너무 빨리 성과를 원했다. 외국 갔다 오면 모든 게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단거리는 2개월 훈련으로 기록이 앞당겨지는 종목이 아님에도 당장 열매를 바랐다는 얘기였다. 김국영은 “체전에 내려가니 기대가 너무 큰 게 느껴졌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뛰기는 처음이다”고 하소연했다.

미국 전지훈련 당시 연맹의 지원도 턱없이 부족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담 지도자나 통역 없이 연맹 매니저와 훈련 파트너만 두 선수와 동행했고, 네 명이 민박집에서 방 2개를 나눠 썼다. 마사지나 치료는 주 1회가 전부였다고 한다.

유망주 전지훈련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10m 허들의 간판 이정준이 2008년과 2009년, 자메이카와 미국에서 전지 훈련을 했다. 하지만 선수만 달랑 보내는 등 지원 부족으로 실패로 끝났다. 연맹은 1~2년 전의 과오를 답습한 것이다.

김국영과 박봉고만 기록이 안 나온 건 아니었다. 육상은 이번 체전에서 한국신기록 3개를 내는 데 그쳤다. 박태환 없이 기록 행진을 벌인 수영이나, 바뀐 규정에도 세계신기록을 쏜 양궁과 비교하면 초라했다. 특히 단거리 기대주들의 부진이 심각하다. 여자 100m 허들 이연경과 200m 전덕형이 잇따라 저조한 기록을 냈다.

단거리 선수들의 컨디션이 떨어진 데는 연맹의 성급한 지도자 교체가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재근 단거리 트랙 기술위원장은 “잘 가고 있으면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데 연맹은 자꾸 바꾸려고 한다. 전체 시스템이 달라져 애들이 공황 상태다”고 말했다. 김국영과 박봉고가 지난 6월 좋은 기록을 내며 상승세를 탔는데 체제가 바뀌면서 분위기가 꺾여 버렸다는 것이다. 육상 단거리팀은 장 위원장 대신 멀리뛰기 출신의 문봉기 총감독과 남상남 연맹 전무가 전면에 나서 선수들을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우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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