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환율 전쟁 속 핫머니 홍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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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자본유입 긴급규제 움직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국제공조에 균열이 벌어지는 모습이다. 자국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을 늘려보려는 선진국의 정책이 화근이다. 엔고를 막기 위해 조엔 단위의 시장개입을 서슴지 않던 일본이 되레 한국과 중국에 개입하지 말라며 짜증을 냈다.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에 위안화 절상을 촉구하고, 유럽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신흥국들도 환율 방어에 고민 중이다. 선진국이 경기부양과 통화가치 절하를 위해 풀어젖힌 돈이 마구 유입되고 있는 탓이다. 이제 국제사회의 키워드는 공조 대신 각자도생(各自圖生)이 돼버렸다.

선진국들이 ‘돈의 수문’을 다시 열어젖히면서 신흥국들에 비상이 걸렸다. 고수익을 좇아 신흥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온 돈이 홍수를 일으킬 지경이기 때문이다. 치고 빠지는 ‘핫머니’가 대거 유입돼 금융 시장이 혼란에 빠지고, 자국 통화 가치가 오르면서 수출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신흥국들의 걱정이다. 제방 쌓기에 나서는 국가도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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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르는 자본 유입 규제=태국 정부는 12일(현지시간) 외국인이 태국 국공채 투자로 얻은 자본 이익에 15%의 세금을 물리겠다고 발표했다. 과도한 해외 자금 유입을 막아보자는 의도다. 콘 차티카와닛 재무장관은 “종전에는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자본이득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 왔다”며 “하지만 올 들어 외국자본이 과도하게 유입되고 있어 자본이득세를 부과키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 현재 태국 국채시장 내 외국인 보유액은 2100억 바트로 지난해 말 100억 바트에 비해 20배 이상 급증했다. 외국인 자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달러에 대한 태국 바트화의 가치도 올 들어 11%가량 올랐다.

태국의 조치는 지난달 브라질이 외국인이 자국 채권에 투자할 때 매기는 금융거래세(IOF)를 기존 2%에서 4%로 올린 데 이은 것이다. 하지만 거센 돈의 물살은 이 제방마저 넘어서고 있다. 외국인 자금 유입세가 꺾이지 않자 브라질은 추가 조치를 공언하고 나섰다. 기두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12일(현지시간) 뉴욕에서 “브라질 헤알화의 지나친 강세를 막을 다양한 수단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방법도 동원할 것”이라며 “실탄이 많다”고 말했다.

그동안 비교적 잠잠했던 신흥국까지 들썩이고 있다. 인도가 대표적이다. 인도 중앙은행의 두부리 수바라오 총재는 지난 주말 미국 워싱턴에서 “자금 유입이 거시경제 상황을 악화시킬 경우 외환시장에 개입할 것”이라고 발했다. 지난 6일 수비르 고칸 부총재가 “전 세계 시장의 유동성이 인도와 같은 신흥국가로 쏠려 위협이 된다”며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을 고려 중”이라고 말한 데 이은 것이다. 인도 루피화 값은 지난달에만 달러 대비 5% 이상 올랐다.

◆한국, 국채 이자소득세 부활 검토=11일 국회의 금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채권 투자에 대한 원천징수세 면제 조치의 폐지는) 금융위 소관 사안은 아니지만, 관계부처와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원론적 발언이었으나 이날 시장에선 국채 금리가 크게 올랐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더 올릴 경우 외국인 자금 유입이 가속화할 것이란 우려가 있던 터라 진 위원장의 발언이 채권 과세 쪽에 방점을 둔 것으로 풀이된 때문이다.

채권 과세는 주로 이자소득세의 ‘부활’을 의미한다. 2006년까지만 해도 외국인의 채권투자 이자소득에 대해 25%의 원천징수 세율이 적용됐다. 내국인 세율(14%)보다 높았다. 2007년부터는 내국인과 동일한 수준으로 인하됐다. 부진한 외국인 채권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어 지난해 6월부터는 아예 비과세로 바꿔 외국인을 우대했다. 외국인의 국채 투자를 활성화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씨티 글로벌국채지수(WGBI)에 편입하기 위한 선결 요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외국인 자금이 넘친다. 2008년 22조3100억원에 그쳤던 외국인의 상장채권 순매수 규모는 올 들어 이달 현재 58조여억원에 달했다. 달러 대비 원화가치도 지난해 3월 초 1600원대에서 1100원대로 뛰었다.

하지만 정부는 대체로 신중 모드다. 김익주 국제금융국장은 “당장은 어렵다”고 말했다.

재정부 안에서 국고국은 더욱 신중하다. 김정관 국채과장은 “환율 압박 요인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국채에 대한 수요를 높여 혈세와 마찬가지인 정부의 이자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통일 재원 등 장기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국채시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므로 다른 나라가 채권 과세를 한다고 무조건 따라 할 것은 아닌 듯하다”고 덧붙였다. 정부 내 공감대가 있다면 G20 정상회의 이후에나, 그것도 신중히 이자소득세 부활을 검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허귀식·조민근 기자

선진국 vs 신흥국 대결 확전

일본의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재무상의 13일 국회 발언은 정치색이 강하다. 엔고(高)를 막기 위한 대규모 시장개입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데 따른 조바심과, 비난 여론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 레토릭이 동시에 담겨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9월 중순 하루 2조엔 규모의 시장 개입에 나섰다. 또 지난달 제로금리 복귀를 발표했다. 그 이후에도 엔고는 진정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미국이 달러를 더 풀겠다고 나서면서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진퇴양난에 빠진 형국이다.

이날 두 사람의 발언은 이 같은 상황에서 나왔다. 발언의 강도와 타이밍, 그리고 발언 장소에서 과거와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게 관심거리다. 무엇보다 환율에 관해 일본 총리와 재무상이 이처럼 강한 수위의 발언을 한 전례가 드물다. 게다가 일본은 지난달 대규모 외환시장 개입을 함으로써 환율 갈등을 초래한 당사자다. 그런데도 한국과 중국에 대해 개입을 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은 ‘적반하장’격이다.

타이밍도 미묘하다. 오는 21일 경주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를 1주일 앞두고서다. G20 정상회의 의장국인 한국을 겨냥한 것도 이번 회의 때 환율과 관련해 분위기를 잡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즉, 추가개입에 대한 명분을 노린 것이다.

발언 장소를 기자간담회가 아닌 국회로 택한 것에도 정치적인 의도가 반영돼 있다. 엔고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내각의 의지를 국회에서 강조했다는 의미다. 게다가 노다 재무상은 추가개입에 대해 “한다고도, 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엔고가 더 진행되면 재차 외환시장에 개입하겠다는 뜻을 시사한 것이다.

어쨌든 일본 총리와 재무상의 발언을 계기로 미·중을 중심으로 한 환율갈등은 선진국 대 신흥국 간의 신경전이라는 새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환율전쟁이 글로벌화한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간 총리와 노다 재무상의 발언에 대해 일절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

한편 올 들어 5월까지만 해도 달러당 90엔 안팎에서 움직이던 엔화 값은 현재 달러당 81엔대로 치솟아 있다. 9월 일본이 시장 개입에 나설 때 방어선으로 언급한 수준이 달러당 82엔이다. 이에 따라 미국 연준이 다음달 ‘양적 완화’ 재개를 공식화할 경우 1995년 기록한 사상 최고치인 달러당 79.75엔을 깰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조민근 기자



미국서 돈 푼다는데 한국이 더 민감
국내로 유입 예상해 주식 대거 매입

한국 시장에도 큰 영향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의사록이 한국 투자자들을 안도시켰다. 13일 미국 연준이 2차 양적 완화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확인되면서 한국의 주가지수와 원화 값이 모두 올랐다. 특히 주식시장에서는 외국인이 순매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관과 개인들은 주식을 쓸어담았다. 미국의 양적 완화 정책에 한국의 투자자들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이었다.

이날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8.11포인트(0.43%) 오른 1876.15에 장을 마감했다. 닷새 만에 상승 곡선을 그렸다.

미국이 2차 양적 완화 정책을 본격화하면 풀린 돈의 일부가 국내 시장에 투자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기관과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외국인은 이날 국내 증시에서 1401억원어치를 순매도했지만 기관은 958억원어치를, 개인은 623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달러화에 대한 원화 값은 전날보다 10.8원 오른 달러당 1120.7원을 기록했다. 전날 14.80원이나 급락했다가 하루 만에 다시 상승세를 탔다.

하지만 달러화 매도는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14일 기준금리를 결정할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가 예정된 데다, 원화 값이 달러당 1100원대로 오르면 외환당국의 개입이 있을 것이라는 경계감 때문이었다. 이미 외환당국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원화가치 방어에 나섰다.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은 외국환 업무를 하는 은행에 대해 19일부터 특별 공동검사를 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지난 6월 자본유출입의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은행의 선물환 포지션 한도를 신설했다. 전월 말 자기자본 대비로 국내 은행은 50%, 외국 은행 국내지점은 250%로 선물환 포지션을 각각 제한했다. 달러가 급격하게 들어왔다 나가는 걸 막기 위해 정부가 꺼낸 카드였다. 은행들은 이에 따라 3개월의 유예기간이 지난 이달 9일부터 선물환 포지션을 축소해야 한다.

채권값은 전날에 비해 약간 올랐으나 전반적으로는 하락세가 지속되고 있다. 국고채(3년물) 금리는 전날보다 0.02%포인트 오른(채권값 하락) 연 3.28%를 기록했다. 외국인의 채권투자 이자소득에 대해 원천징수를 부활할 수 있다는 일부의 움직임에 외국인 투자세가 주춤했다. 하지만 외국인은 올 들어 이달 12일까지 장외시장에서 국내 채권을 60조9423억원어치나 순매수(매수-매도)했다. 최근의 채권금리 하락은 채권을 사려는 수요가 강한 데다 향후 금리 인상 기대가 약화됐기 때문이라는 게 한국은행의 분석이다.

한은은 이날 발표한 ‘9월 중 금융시장 동향’ 자료에서 “국고채 금리는 내림세를 지속하고 있다”며 “이는 채권을 사려는 외국인 투자자가 늘어난 데다 8월과 9월 두 달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금리 인상 기대가 약화한 게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김종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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