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186) 장징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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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모 왕차이위(王采玉)의 품에 안겨있는 유아시절의 장징궈. 1911년 저장(浙江)성 펑화(奉化)현 시커우(溪口). 김명호 제공

신해혁명 성공 후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됐다. 쑨원(孫文)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군대가 없이는 통일과 민주공화제의 실현이 불가능했다. 독일·일본·미국과 접촉했지만 다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소련 쪽으로 눈을 돌렸다. 10월 혁명에 성공한 소련도 동방의 협력자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쑨원은 국민당을 레닌식 정당으로 개조했다. 중공당원들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다. 소련은 북벌(北伐) 성사를 위해 광저우(廣州)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군사고문단과 현대식 무기를 지원했다.

쑨원이 죽자 베이징과 모스크바에서 연일 대규모 추모행사가 열렸다. 소련은 중국혁명을 수행할 “정치간부”를 양성해 주겠다며 모스크바에 중산(中山)대학을 설립해 쑨원을 기념하고 양국의 우호를 세계에 과시했다.

노동자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상하이 푸둥(浦東)중학에서 퇴학당한 장징궈(蔣經國)는 베이징에서 프랑스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쑨원 추모행사를 참관하며 감동을 받았다. 1년 전 아버지 장제스(蔣介石)를 만나러 황포군관학교에 갔을 때 봤던 국·공 합작과 군벌타도에 관한 온갖 벽보들이 생각났다.

▲1937년 3월 귀국 도중 하바롭스크 중국영사관 문전의 장징궈. 앞줄 왼쪽에서 넷째가 2년 전 결혼한 부인. 부인 오른쪽이 장징궈. 처음 모스크바의 중국대사관에 나타났을 때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신해혁명 성공 후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됐다. 쑨원(孫文)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군대가 없이는 통일과 민주공화제의 실현이 불가능했다. 독일·일본·미국과 접촉했지만 다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소련 쪽으로 눈을 돌렸다. 10월 혁명에 성공한 소련도 동방의 협력자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쑨원은 국민당을 레닌식 정당으로 개조했다. 중공당원들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다. 소련은 북벌(北伐) 성사를 위해 광저우(廣州)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군사고문단과 현대식 무기를 지원했다.

쑨원이 죽자 베이징과 모스크바에서 연일 대규모 추모행사가 열렸다. 소련은 중국혁명을 수행할 “정치간부”를 양성해 주겠다며 모스크바에 중산(中山)대학을 설립해 쑨원을 기념하고 양국의 우호를 세계에 과시했다.

노동자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상하이 푸둥(浦東)중학에서 퇴학당한 장징궈(蔣經國)는 베이징에서 프랑스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쑨원 추모행사를 참관하며 감동을 받았다. 1년 전 아버지 장제스(蔣介石)를 만나러 황포군관학교에 갔을 때 봤던 국·공 합작과 군벌타도에 관한 온갖 벽보들이 생각났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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