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장기화하는 환율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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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신(新)플라자 합의’는 없었다. 환율 전쟁이 화두로 부각된 지난 주말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총회에선 불협화음만 가득 울려퍼졌다. 단 하나의 성과라면 국제적으로 이견이 크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이제 ‘조율’의 무대는 22~23일 경북 경주에서 열릴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담과 11월 서울 정상회의로 넘어갔다.

이번 워싱턴 회합을 앞두고 국제금융협회(IIF) 등은 환율 전쟁을 막을 ‘평화협정’ 도출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협력이 절실하다는 목소리만 나왔다. 돌려 말하면 그만큼 협력이 어려운 여건이란 얘기다. 달러 약세에 합의한 1985년 ‘플라자 합의’ 때는 선진국끼리만 합의하면 됐다. 일본·독일은 미국 시장에 목을 매고 있었고, 선진국 클럽 멤버로서 책임감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세계 경제 상황은 다르다. 쇠약해진 선진국과 덩치가 커진 신흥국의 이해가 엇갈리는 데다 양 진영 내부에서조차 입장이 일치하지 않는다. G20 서울 회담에서도 합의 도출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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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과 신흥국의 대결=미국·유럽연합(EU) 등 선진국 그룹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은 중국을 협공했다. “저평가돼 있는 중국 위안화가 세계 경제의 불균형 해소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흥국들은 “환율이 시장의 여건을 반영해야 한다”는 요구에 거세게 반발했다. 중국·브라질·러시아·인도 등 브릭스(BRICs) 국가들은 집단 대응도 시사했다.

드미트리 판긴 러시아 재무차관은 7일(현지시간) “자유로운 환율 변동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며 “이번 회의에서 ‘거친 평가’를 하려는 시도에 대해 브릭스 국가들은 강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도 그럴 것이 신흥국들은 최근 환율 갈등의 근원이 선진국에 있다고 보고 있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초저금리를 장기간 유지하고, 이도 모자라 최근 돈을 찍어내 경기 부양에 나선 탓이라는 것이다. 이 돈이 신흥시장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어 시장을 불안하게 하고, 신흥국 통화 가치도 급격히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양적 완화’로 선진국이 퍼부어놓은 돈을, 신흥국이 외환시장 개입으로 다시 퍼내는 양상이다.

신흥시장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됐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중국을 두둔하고 나선 브라질이 대표적이다. 중국이 자원 수입을 늘리면서 지난해 브라질의 대중 수출은 25%가량 늘었다. 반면 미국으로의 수출은 절반 가까이로 줄었다.

이에 따라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브라질의 최대 무역 파트너가 됐다. 브라질 외무장관은 최근 미·중 간 환율갈등과 관련해 “한 나라를 압박하는 건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며 “우리는 중국과 좋은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을 향해 공동 보조를 맞추고 있는 선진국 그룹 내부에도 알력은 잠재해 있다. 유럽은 전체적으로 무역수지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위안화 절상에 미국만큼 절실하지 않다. 게다가 최근 미국과 일본이 경쟁적으로 ‘양적 완화’에 나서면서 유로화 가치가 오르는 것도 못마땅하다는 입장이다.

7일 유로화 가치가 유로당 1.4 달러까지 치솟자 장 클로드 융커 유로그룹 의장은 “달러가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도 이날 “강(强)달러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며 달러 약세에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다. 유럽은 재정위기 등으로 미·일처럼 공격적으로 양적 완화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다. 반면 미국은 유럽이 환율을 위기 탈출 도구로 쓰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리스 위기 등을 거치며 유로화는 올 초보다 달러에 대해 절하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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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타협 나서나=당초 미국은 중국 위안화 문제를 미·중만의 갈등이 아닌 ‘세계 경제 불균형’의 문제로 격상시키길 바랐다. 이에 따라 이번 회의에서 IMF 등이 ‘총대’를 메고 나서길 요구했다. 국제적 압박을 통해 중국이 위안화 절상에 나서면 중국 눈치를 보던 신흥국들도 따라서 자국 통화 절상에 나설 여건이 조성된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 IMF의 한계는 여실히 드러났다. 스트로스칸 총재도 합의문에 대해 “효과적이지 않다”고 자인했다. IMF 이코노미스트를 역임한 에스와르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는 “이번 IMF 총회는 집단적 협력이 여전히 이상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줬다”고 말했다.

현재로선 미·중 간 갈등이 악화돼 무역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아직 크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무역전쟁으로 확산할 경우 양측의 손실이 큰 만큼 G20 회의를 전후해 물밑 접촉 등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G20 서울 회의에서 환율 문제가 해결되길 기대하는 건 무리”라면서도 “우리의 외교적 역량에 따라 아시아 지역 통화의 점진적 절상을 유도한 2003년 ‘두바이 G7 합의’ 수준의 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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