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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부외과 진료비 인상분, 엉뚱한 데 쓰여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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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충청도에 있는 한 종합병원 흉부외과의 일정은 살인적이다. 흉부외과 막내인 전공의(레지던트) 2명은 1주일 20건에 이르는 수술에 모두 참여한다. 아침 8시쯤 시작한 수술은 12시간 이상 이어진다. 점심은 고사하고 저녁도 10시나 돼야 챙긴다. 수술실을 벗어나도 휴식은 없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환자의 위급상황에 대비해 당직이 이어진다. 인력이 부족해 한 달에 20일 이상 당직을 서는 경우도 있다. 이 병원의 조교수들도 보름은 당직이다. 심장·폐·식도암 등의 고난도 수술을 하는 흉부외과는 병원의 많은 진료과 중 ‘최고(最苦)의 3D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최근 10년 가까이 레지던트 지원율이 50%를 밑돌아 진료 환경이 더 열악해지고 있다.

이런 흉부외과를 살리기 위해 보건복지부는 2009년 7월 1일 흉부외과 진료비(수가)를 100% 인상했다. 당시 진료비 인상은 만성적자에 허덕이는 보험재정상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레지던트 지원 감소가 결국 흉부외과 전문의 부족으로 이어지고, 국민들이 제때 치료받을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어렵게 진료비가 인상됐다. 이후 각 병원에 지급된 인상 진료비는 총 480여억원으로 추산된다. 흉부외과 의사들은 이 돈이 의료 인력을 확충하고, 진료환경을 개선하는 데 집행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각 병원에 흘러 들어간 진료비는 취지에 맞게 쓰이지 않았다. 사립병원들은 진료비 인상분의 일부만 흉부외과에 썼다. 국립대 병원의 실정은 더 심각했다. 레지던트 처우 개선 등에 인상 진료비의 15% 내외만 집행하는 데 그친 것으로 파악됐다. 병원 경영진은 흉부외과가 만성적자라는 점, 다른 진료과와의 위화감이 조성된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처우개선이 부족한 국립대와 지방대 병원은 레지던트가 지원하지 않는 왜곡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지방병원 교수 월급이 서울 대형병원 레지던트보다 못한 곳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흉부외과 의사와 병원 경영진 간에 갈등이 초래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일각에선 ‘남의 손에 쥐어진 내 떡’ ‘수재의연금을 가로챈 몰지각한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국립대 병원장들 간에 인상된 진료비의 일부만 흉부외과를 위해 집행하자는 묵계가 있었다는 정황도 잡히고 있다.

진료비 인상분이 병원에 지급된 지 1년이 넘었다. 이 돈이 흉부외과를 위해 적절히 집행되지 않는 것은 이를 병원 수익으로 생각해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대한흉부외과학회는 병원에 강제성을 띤 집행명령을 내릴 수도 없고, 학회 회원들에게 법적인 문제로 비화시켜 병원과 힘겨운 싸움을 하도록 유도하기도 어려운, 참으로 딱한 지경에 놓여 있다.

지금 흉부외과 의사들은 다시 한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 물론 흉부외과를 살리기 위해선 지원금만이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제대로 집행 한번 하지 않고 흉부외과 의사와 대립하고 있는 병원의 모습은 시정돼야 한다. 인상된 흉부외과 진료비는 국민건강을 위한 흉부외과 의사 확보와 진료의 질 향상이라는 당초 취지에 맞게 사용돼야 할 것이다.

안혁 대한흉부외과학회 이사장·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