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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올린 지 30년·18년 된 그들 따라 오르다 … 이런, 원단에 흠집 났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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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지긋이 물고 손가락 끝에 힘을 준다. 등반가의 모든 신경이 집중되는 순간이다.

고백할 게 있다. 기자의 최종학력은 ‘등졸’(등산학교 졸업)이다. 등산학교에서 졸업장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안전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또 고백하자면, 등산학교에서 암벽등반을 가르치는 줄 몰랐다. 가니까 그것을 가르쳐줬고 ‘안전하게’ 배웠으며 안전의식이 한껏 충전돼서 나왔다. 안전한 암벽등반. 앞뒤가 안 맞는 말로 이해하는 분도 있겠다. 혀를 끌끌 찰 분도 있겠다. 하지만 암벽등반은 생각보다 안전하다. 몇 가지 안전수칙만 지킨다면 말이다. 중독성 있다. ‘짠 곳’에서 ‘오토바이 타며’ ‘원단에 흠집’이 나도 까끌까끌한 바위의 감촉을 느끼러, 곤혹스러움을 겪으러 다시 바위로 향한다.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에서 양대 문파의 암벽 고수 둘을 만나 함께 서로의 바위를 올랐다.

글=김홍준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30년 바위 사랑, 선인파 이연희

선인봉 정상서 밀가루 배급해 준대요 ^^

선인봉 요델버트레스에서 등반 중인 암벽 등반 30년 경력의 ‘선인파’ 이연희씨.

‘선인파’ 이연희(50·바우산악회)씨. 입산수도 30년의 고수다. 30년 전 선인봉에서 첫 암벽등반, 즉 ‘머리를 올린’ 뒤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일과 출산, 육아로 바위를 멀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틈에 다시 바위의 품에 안겨 있더란다. 그가 오름짓으로 택한 길은 요델버트레스다. 요델산악회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작업에 들어가 75년에 완성시킨 길이다. 기자보다 나이가 많은 루트다.

출발하자마자 고빗사위다. ‘짜다’. 바위의 난도가 꽤 높다는 말이다. 무공의 진수를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연희씨는 매우 싱겁게 돌파해 버렸다. 득도의 경지는 무(無)라고 했나. 아무 소리도 없었다.

“언니, 간만의 등반이라며 오토바이 타지도 않으셔~.”

선등자 이연희씨를 확보(선등자가 위험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로프를 조절해 주는 행위)하는 ‘인수파’ 김홍례(44·김용기등산학교 강사)씨가 너스레를 떤다. 그나저나 바윗길에서 어떻게 오토바이를 탈까. 행여 추락할까 두려움에 다리가 저절로 덜덜덜 떠는 것을 일컫는 말이란다. 이연희씨는 ‘프렌드(friend)’를 꺼내 바위틈에 끼운 다음 그곳에 퀵드로를 건 뒤 로프를 통과시킨다. 프렌드의 정식 용어는 SLCD(Spring Loaded Camming Device·사진). 1978년에 이 장비를 발명한 레이 자딘이라는 미국인이 친구와 함께 등반을 나섰다. 그 친구 왈. “그 친구(장비를 말함) 가져왔어?” 그날 이후로 이 장비는 프렌드로 불렸다는 게 이연희씨의 말.

나와 사진기자도 힘겹게 등반에 나섰다. 팔로는 바위를 얼싸안고 발로는 암벽을 박박 긁으며 올라갔다. 신음을 한껏 토하고 나서야 한 구간을 마쳤다. 이상하다. 넌더리가 날 만한데, 밀려오는 이 쾌감, 이 뿌듯함은 뭐람.

저마다 사정이 있겠지만 암벽등반의 계기가 있을 터. 하여 이연희씨에게 물어봤다. “선인봉 정상에서 밀가루 배급해준다기에 바위에 입문하게 됐어요.” 이런! 이연희씨가 바위에 입문한 30년 전은 혼분식을 권장하던 시절이었다. 바위꾼들끼리 나누는 꽤 오래된 농담인데도, 그래서 웃음이 나오는데도 밀가루음식 먹은 것처럼 뒤가 허전했다. 바위의 고수들은, 암벽에서 배고픔을 잊었나 보다.

18년 등반 열정, 인수파 김홍례

인수봉 정상에는 커피 자판기 있지요 ^^

선인봉 등반을 마치고 한달음에 인수봉으로 향했다. 30도가 넘는 폭염에, 하루에 인수봉 두 코스가 아니라 선인봉에서 인수봉으로 뜀박질한 경우도 흔치 않겠다. ‘인수파’ 김홍례씨는 18년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결과, 뭇 범인(凡人)들이 혀를 내두를 경공(輕功·몸을 가볍게 해, 뛰듯이 걷고 날 듯이 뛰는 무술법)을 익혔다. 거룡길에 오른다. 거룡길은 용의 비늘이 춤추듯 흘러가는 밴드(바위에 난 굵은 띠)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72년에 거리산악회가 개척했다. 암벽등반이 생과 사를 오가는 곡예가 되지 않고 안전한 ‘레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공부다. 옷 입는 법부터 장비 사용, 등반 시스템, 구급법, 독도법 그리고 자기 몸 관리법까지….

“바닥 칠라.”

확보를 보는 이연희씨가 걱정을 한다. 추락으로 몸이 바닥에 부딪히지 못하도록 온 신경을 쓴다. 스르르르… 한 마리 뱀처럼, 로프는 유연하게 바윗살을 훑고 지나간다. 손끝은 미세한 돌기를 부여잡고 발끝은 얄팍한 홈을 디디며 과감하게 올라간다. 등반의 성공은 체력이 아니라 마음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고 한다. 추락의 공포를 저 뒤로 보내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피치 완료. 기자는 속절없이 두레박질 당하며 자의반 타의반으로 끌려 올라갔다. 그러다, 쭈욱~. 발이 미끄러지며 몸이 바위에서 벗어나 허공에 매달렸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식은땀이 흘렀다. 10년 전에 먹은 밥 알갱이가 속에서 곤두섰다. 바윗결에 스친 손 이곳저곳에 생채기가 났다. “저런, 원단에 흠집(기스) 났네.”

이연희씨가 밑에서 혀를 끌끌 찼다.

대체 이 짓을 왜 하는 거야? 궁금해서 김홍례씨에게 물어봤다. “중독입니다. 바위 중독. 일주일만 안 해도 온 몸에서 가시가 돋아요.” 인수봉 정상에 가면 무엇이 있는지 물어봤다. “커피 자판기가 있어요. 가실래요?” 선인봉 정상에서는 밀가루를 배급하고, 인수봉 정상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다고? 또 농담이겠지. 그런데, 궁금하다. 밀가루를 주는지, 커피 자판기가 있는지 이번 주말에 한번 오를 생각이다. 이거, 정말 중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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