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문턱, 이젠 넘자 ② 중국어, 중학교부터 정규 과목으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중견 화학업체의 상하이 법인을 맡고 있는 H 법인장. 그는 지난 4월 난징(南京)의 바스프(BASF)차이나가 발주한 중간재 공급권을 따내기 위한 수주전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PT(프레젠테이션)를 영어로 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어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수주전엔 중국과 대만·일본 업체도 뛰어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영어로 결정했다. 중국어가 서툴러서다. PT는 완벽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만 업체의 승리였다.

“가격·품질 모든 면에서 우리가 앞섰는데…. 영어 PT에 중국인 심사원들이 약간 불편해하는 눈치였어요. 아차 싶었지요.” 35억원짜리 비즈니스가 날아가버린 것이다. 그는 이후 아무리 바빠도 하루 두 시간씩 중국어 공부에 할애하고 있다.

중국 비즈니스 현장은 전쟁터다. 우리 기업은 물량을 앞세운 중국 업체와 기술을 내세운 서방 기업의 협공을 받는 신세다.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현지화가 답이다. 그리고 그 현지화의 바탕은 언어다. 중국어 인력이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현장에서는 아직도 미흡한 형편이다.

천민(陳珉·42) 중즈(中智)인력자원관리자문 부사장은 “한국 기업인들은 끼리끼리 뭉치는 나쁜 성향이 있다”고 꼬집는다. 말이 안 되니까 중국인과의 만남을 피하고, 비즈니스 기회에서 자꾸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본사에 이구동성으로 요구하는 게 바로 ‘중국어 인력을 보내달라’는 것이다. 주재원을 파견할 때 다른 건 몰라도 중국어 교육만큼은 철저하게 시키라는 주문이다.

국내에서도 중국어 필요성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한 해 약 150만 명의 중국 관광객이 한국 쇼핑센터를 휘젓고 있다. 중국과 FTA를 체결하게 되면 양국 간 경제 국경이 사라질 수도 있다. 전국민이 중국어로 무장해야 할 시점을 맞고 있는 것이다.

아이훙거(艾宏歌) 주한 중국대사관 교육참사는 “지난해 방중한 오바마 미 대통령이 2012년까지 10만 명의 미국 학생을 중국에 유학시키겠다고 약속한 건 글로벌 시대의 중국어 중요성을 설명하는 좋은 예”라고 말한다.

그러나 국내 사정은 거꾸로 가고 있다. 8월 19일 교육부가 2014학년도 대학수능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중국어를 포함한 제2외국어를 수능에서 제외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게다가 2009년 고교 교육과정에선 과거 독립 영역으로 존재하던 제2외국어를 생활·교양 영역으로 합쳐 버렸다. 이에 일부 학교가 국·영·수 중심의 수능에 대비하기 위해 재량과목에서 중국어를 제외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강남의 A 중학교는 올 초 전근 발령이 난 중국어 담당 교사 대신 기간제 교사를 뽑았다. 5년 내 중국어 수업을 폐지할 것이란 소문도 돌고 있다.

반면 미국 등 서방은 중국어 교육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10년 전 미국 중·고교에 중국어반이 개설된 학교는 300여 개였다. 지금은 1600여 개로 급증했다. 중국어를 가르치는 학교 수는 1997년 전체의 1%에서 2008년 4%로 높아졌다. 2007년엔 미국 대학과목 선이수제(AP) 시험에 중국어가 도입됐다. 응시자가 급증해 올해 독일어를 제치고 스페인어·프랑스어에 이어 3위를 차지할 게 확실시되고 있다.

영국도 중국어 조기 교육에 적극적이다. 에드 볼스 영국 초·중등교육 장관은 “글로벌 시대에 필요한 능력으로 대표적인 게 중국어”라고 강조한다. 현재 영국은 중등학교 7곳 중 1곳 꼴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중국어 능력을 향상시켜야 할까.

조기 교육과 정규 교육이 중요하다. 이 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적어도 중학교 때부터는 중국어를 정규 과목으로 편성해 가르치는 것이다. 중앙일보가 ‘생활 외국어는 필수다’는 캠페인을 벌인 게 지난 2002년이었다. 영어는 기본, 중국어는 핵심 외국어로 가르치자고 주장했다. 중국어 선택 고교생은 당시 8만8641명에서 지난해 19만5305명으로 늘었다. 전체 학생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7.3%에서 13.1%로 늘었다.

또 지난해 도입된 BCT(비즈니스중국어 시험)를 신입사원 채용에 활용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오명 KAIST 이사장은 “국제화=영어화란 인식을 버려야 한다. 중국화도 국제화다”며 “앞으론 영어보다 중국어를 쓸 기회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G2시대다. 한국이 선진국의 문턱을 뛰어넘으려면 ‘중국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돼야 한다. 김현철 연세대 교수는 “입시 부담이 적고, 언어감수성이 살아 있는 중학생 때부터 중국어를 정규 과목으로 편성해 가르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제안했다.

한우덕·신경진 기자

☞◆BCT(Business Chinese Test·商務漢語考試)=중국어 보급 국가기관인 한판(漢辦)이 주관하는 비즈니스 중국어 시험이다. 국내에서는 중앙일보가 시행하고 있으며 공식 사이트(www.bctkorea.co.kr)를 통해 공고된다. 무역·투자·협상 등 기업활동에서 쓰이는 중국어 구사 능력을 평가해 등급을 부여한다. 삼성전자·금호아시아나·하이닉스·신한은행 등이 신입사원 채용에 활용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