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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연극] ‘적도 아래의 맥베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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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연합군 포로 수용소 군속(軍屬)’을 들어봤는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 동남아에서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던 이들을 말한다. 이들 중엔 일본군에 징집된 한국인도 있었을 터. 3000여 명이나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엔 어떻게 됐을까. 포로를 학대했다는 이유로 연합군에 의해 전범 처리돼 수십 명이 사형당했다. 살아 남았다 해도 한국에선 ‘대일협력자’란 눈총을, 일본에선 ‘외국인’으로 잊혀져갔다. 연극 ‘적도 아래의 맥베스’는 이들 군속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적도 아래의 맥베스’의 연출은 손진책씨가 맡았다. 주인공 김춘길로 나오는 서상원(왼쪽에서 셋째)씨의 연기는 비장하면서도 서늘했다. [명동예술극장 제공]

작가는 재일교포 2세 정의신(53)씨다. 어딘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정씨는 지금껏 한·일 양국에서 모두 외면 받아온 이들의 정체성 문제를 파헤쳐 왔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하고 집요하게. 왜? 평생 가슴에 켜켜이 쌓여온,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2008년 한·일 양국에서 온갖 연극상을 휩쓴 ‘야끼니꾸 드래곤’은 그 결정판이었다. 그런 이력을 가진 작가가, 경계인의 정점에 있다고 할만한 수용소 감시원의 얘기를 다루니, 어찌 문제작이 되지 않으랴.

작품은 물론 실화다. 전범 재판에서 두 번이나 사형을 선고 받았던 한국인 이학래(85)씨가 작품 속 주인공 김춘길의 모델이다. 극중 이런 대사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10년 후 20년 후 아니 50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쓴 이 편지를 누군가가 읽고서, 나의 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이해해 주는, 그런 날이 온다면…. 이런 생각을 하면 내 가슴 속에 촛불처럼 작은 불빛이 켜지고 평온한 마음이 되요.”

작가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소명의식에서 이 작품을 썼을 게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게 자신이라고 믿었던 작가가, 자신보다 훨씬 비극적 운명에 휘말렸던 이를 만나게 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무게감은 천하의 이야기꾼 정의신마저 짓누르고 말았다.

극은 사건 자체로 쑤-욱 들어가지 못한 채 겉을 빙빙 돌았다. 회상형의 구조는 아무리 눈물을 쏟아내고 불안감을 호소해도 결국은 과거의 후일담일뿐, 팽팽한 현실과 직면하진 못했다. 건조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다. 거기엔 분명 작가의 부담감이 작용했을 법 싶다. 새삼 위대한 예술 작품이란 비극적 현실을 100% 재현하는 게 아닌, 작가의 ‘위대한’ 곱씹음이 있어야 함을, 작품은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최민우 기자

▶연극 ‘적도 아래의 맥베스’=14일까지 명동예술극장. 2만∼5만원.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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