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글 읽어도 뜻 잘 몰라 … “분수대가 뭡네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이군은 지금까지 반에서 꼴찌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군과 같은 새터민 청소년들의 학업 성취도가 국내 다른 사회 소외계층 청소년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초등학생과 중·고생의 국어 성적도 외국인 부모를 둔 다문화 가정 청소년보다도 10~20점(100점 만점)이 낮았다.

새터민 대안학교인 한꿈학교에서 청소년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곽정래 교감은 “탈북 과정에서 학교에 못 다녀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한꿈학교 제공]

자료:한국연구재단 지원보고서

◆한글 이해 못하는 새터민 아이들=이화여대 신동희(과학교육과) 교수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새터민 청소년과 다문화·저소득층 청소년, 그리고 일반 청소년 등 1400여 명을 대상으로 최근 1년간 국어·수학·과학 과목의 학업 성취도를 비교한 결과를 4일 공개했다. 새터민 청소년의 평균 성적은 일반 학생에 비해 과목별 평균에서 20점 안팎으로 낮게 나타났다. 새터민 청소년의 학업 성취도에 대한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 교수는 조사 대상 청소년들을 초등학생과 중·고생 두 그룹으로 나눠 조사했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실시하는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추려낸 문제를 풀게 한 뒤 성적을 비교했다. 새터민 중·고생의 국어 성적이 다문화 가정 청소년보다 20점 가까이 낮았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새터민 청소년들은 일상적인 대화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학습에 필요한 읽기·쓰기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국어 문제 중 읽기 영역의 점수도 새터민 청소년이 다문화 가정 청소년보다 더 낮았다. 새터민 청소년들의 평균이 12.45점이었고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15.34점이었다. 일반 청소년은 21.06점이었다. 신 교수는 "학년을 구분하지 않고 평가해 전체적으로 성적이 낮았지만 새터민 청소년 성적이 유독 낮았다”고 말했다.

부산에 살고 있는 새터민 박철민(12·가명·초등학교 6학년)군은 수학·과학 등의 과목에서 평균 80점 이상의 높은 점수를 받은 우등생이지만 국어 점수는 70점대였다. 지난 3월 실시된 전국 학업성취도평가에서는 60점을 받았다. 박군을 가르치는 강미혜 교사는 “남한에서는 북한에서 쓰지 않는 외래어 등을 많이 쓸 뿐만 아니라 같은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에 박군이 적응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자료:한국연구재단 지원보고서

◆“기초학력 쌓을 시기에 피난 생활”=신동희 교수는 “새터민 청소년들의 학습 환경은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포함한 다른 소외계층보다 더 열악하다”고 진단했다. 학습 환경이 나빠 학업성취도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새터민 청소년 대부분이 탈북 과정에서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의 기간 동안 공부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새터민 청소년의 학습 결손 시기가 기초학력을 쌓아야 할 시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한창 기초적인 학습을 할 나이에 중국 등에서 숨어 지냈기 때문에 학업 공백이 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한국에 정착한 후에도 문제는 여전하다. 새터민 청소년의 학업 수준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적당한 학년에 편입을 시켜 학습 공백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새터민 학생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는 “학부모 면담 등을 통해 학생의 실력을 가늠할 뿐 공식 평가가 없다”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또래와 어울리는 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많아야 한두 학년 낮게 편입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새터민 청소년의 불안정한 가정환경도 학업 성취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탈북 과정에서 가족 중 일부가 북송되거나 아예 북한을 빠져나오지 못한 경우에 정상적인 청소년기를 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 한만길 소장은 “정부로부터 정착금 등의 지원을 받아도 북에 남은 가족을 한국에 데려오는 데 쓰거나, 생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수준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학습 문제는 방치된다”고 말했다.

정선언 기자, 홍혜현 객원기자(KAIST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