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cover story] 붕기 풍어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 (1) 선주들과 함께 피고사를 올리고 있는 인간문화재 김금화씨.

▶ (2) 한바탕 놀이마당이 펼쳐지고….

▶ (3) 본굿에 앞서 제사 음식을 지고 마을을 한바퀴 돈다.

▶ (4) 마을제의 하이라이트, 당집 달리기를 마친 뒤 깃발을 앞마당에 가지런히 꽂아 놓는다.

▶ (5) 제물로 바친 황소 고기와 새로 담근 막걸리를 동네 사람들이 나눠 먹으며 추위를 달랜다.

▶ (6) 밤새 계속되는 본굿. 마당에서는 모닥불 앞에서 이웃 마을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고….

▶ (7) 이튿날 새벽 지숙경쟁을 마친 선주가 풍어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다.

황도 붕기 풍어제는 충남 무형문화재 12호다. '붕기'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은 만선의 배에 다는 기. 긴 대나무 장대에 대나무를 쪼개어 묶은 다음 흰 종이를 잘라 감은 뒤 끝에 붉고 푸른 종이꽃을 만들면 된다. 풍어제가 열린 지난 10일은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 만큼 칼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그러나 황도리 사람들의 열기는 그야말로 후끈했다.

*** "옷이 이쁜 놈을 골라야 혀"

마을제는 음력 정월 초 이틀에 불과하지만 이미 준비는 그믐 한 달을 꼬박 들여야 한다. 이장을 중심으로 붕어제 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은다. 특히 외부에서 구경 오는 사람들까지 신경써야 할 음식 준비가 큰일. 60여명에 이르는 마을 아낙네들이 투입된다. 떡국 등 음식은 몽땅 공짜.

무엇보다 제물로 바쳐질 황소를 고르는 일은 까다롭기 그지없다. 마을 어르신 대여섯 분이 발품을 팔아 각 지역을 돌며 튼튼한 수소를 고른다. 암컷이 아닌 수컷을 고르는 것은 서낭당에 모신 뱀신이 여자이기 때문. 박희태(60)씨는 "소는 뿔이 반듯하고 흰털 등 잡털이 없어야 돼. 한마디로 옷을 이쁘게 입은 놈이어야지"라고 말한다. 상인이 제시한 가격은 절대 깎지 않는다고.

소는 붕어제가 열리는 당일 아침에 잡는다. 죽기 전에 '음매'하고 여러 번 울수록 마을의 운수가 좋다고 믿고 있다.

*** "돼지고기 먹으면 부정 타"

점심을 마을 회관에서 간단히 때운 뒤, 오후 1시쯤부터 붕어제는 '피고사'와 함께 막이 오른다. 본격적인 고사에 앞선 일종의 맛보기인 셈. 인간문화재 김금화(74)씨가 무당 역할을 맡아 전반적인 제사를 주관했다. 김씨가 당집에서 축원을 하자 검정색 두루마기를 걸친 선주들이 앞 마당에 늘어서 고사를 지냈다.

예전엔 당집에 부정 탄다고 여자를 아예 들이지 않았다고. 현대로 들어서면서 그런 풍속은 없어졌다. 그런데 고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밖에서 기웃거릴 뿐 좀체 들어오지 않는 주민이 한 명 눈에 띄었다.

"한달 전에 초상을 치렀어. 행여 부정 탈까봐. 사람들이 들어오라고 하지만 딴 사람한테 피해 주면 안 되잖여."

황도리 주민들이 믿는 부정은 또 한 가지 있다. 돼지가 뱀과 상극이라는 이유로 돼지는 아예 키우지도 않는다는 것. 외부 사람이 구경올 때도 꼭 물어보는 게 있단다. "돼지고기 좋아하지?"에 "예"라고 대답했다간 바로 출입 금지다.

***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옥동 도화 만사춘하니 가지가지 봄빛이 왔다 허허어이 헤에이~."

마을 회관 앞에서 꽹과리 소리에 맞춰 붕기 타령이 한바탕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된다. 어떤 이는 북을, 다른 이는 장구를 잡았다. 능숙하고 호흡도 척척 맞는다. 마을에서 직접 지은 막걸리도 한잔 걸쳤겠다, 금세 농악과 어깨춤이 뒤섞인다.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물으니 "얼어죽을 연습은 무신, 평생 해왔는데. 동네 주민 누구도 다 나만큼은 혀." 풍어제의 유래는 누구도 모른다. 아주 오랜 옛날로만 알고 있다.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밤, 출어를 한 황도리 어선들이 항로를 잃고 표류할 때 지금의 당산에서 밝은 불빛이 나와 무사히 귀로를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곳에 당집을 짓고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농악대가 앞장서고, 하늘.구름.태양.무지개.바다를 각각 뜻하는 오색기를 든 선주들이 마을을 한바퀴 돈다. 집에 머물던 주민들도 이를 따라 자연스레 한 무리를 이루는 과정. 이들은 다시 당집으로 올라가 온 주민이 참여한 본고사를 치른다.

그런데 그렇게 경건하지만은 않다. 고사를 지내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고 제각각이다. "축제인디 심각할 필요는 없지." 훤한 대낮에 시작된 본고사는 밤 12시를 넘기며 새벽까지 이어진다. 사람들은 좀체 자리를 뜨질 않는다. 오용접 이장은 "풍어제 무사히 치르려고 우린 운동도 열심히 해"라고 말한다.

*** 음식 나누어 배마다 고사

다음날, 동이 막 틀 무렵 '지숙 경쟁'이 행해진다.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각 배에 나누어 주는 것. 그 음식으로 배에서 고사도 치른다. 10여 척의 배가 나란히 선 해안가는 어딘가 쓸쓸하다. 전날의 흥겨움은 사라진 채 아침의 고요함만이 감돈다.

한 선주의 말. "예전엔 제사 음식을 나눌 때도 서로들 많이 가져가려고 아우성을 치고 으쌰으쌰 했는디 지금은 어디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 남아 있어야지." 그럼 이젠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슬쩍 물어봤다. "명절날 왜 가족들 줄줄이 모여 제사 지내? 그것도 현대적인 시각에서 따지고 보면 미신 아닌겨. 풍어제라도 있으니 소원한 이웃들끼리 오랜만에 서로 합심하고 함께 어울리는 것 아니겠어. 황도리가 없어지면 모를까, 그때까진 풍어제가 쭉 있을 거라고."

황도=최민우 기자<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