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세계' 고은·박정만 등 술에 얽힌 일화 담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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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술은 무엇일까.

"요즘 시인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던 고은 시인의 일갈처럼 술은 여전히 "문학의 혁신에 가장 크게 기여한 동인"(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인가. 그러고 보니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던 보들레르의 150년 전 가르침을 끔찍히 받들어 모시는 '애술가'들이 시단(詩團)엔 유독 많이 눈에 띈다. "입을 가진 액체는 술밖에 없다"(채호기)며 술을 생명체로 인식하는 주당(酒黨)도 있는 판이니까.

시 전문계간지 '시인세계'가 봄호 기획특집으로 이 흥미진진한 주제를 다뤘다. 이름하여'시인과 술'. 정규웅.장석주씨 등 필자 12명이 동서고금 주선(酒仙)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풀어냈다.

맨처음 눈에 띈 건 역시 고은이다. 이미 한창 술이 올라있던 시인, 소설가 박경리씨의 모친상 소식을 듣자 한걸음에 문상을 간다. 그리고 상가(喪家)에서 젓가락으로 바가지를 두드리며 불경을 왼다. 만취 상태였던 시인이 그때 청아한 목소리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둔갑'했던 일은 지금도 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가장 극적인 주인공은 고 박정만 시인. 1981년 '한수산 필화 사건'에 연루돼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후유증에 시달리다 '밥 대신 술로 사는 생활'에 빠졌다. 87년 한해 동안엔 1000병 이상의 소주를 마셨다. 마당에 늘어놓은 빈 소주병을 당시 중앙일보 문학 기자였던 기형도 시인이 목격했다. 작고하기 서너달 전부터는 아예 곡기를 끊고 소주만 들이켰다. 그 기간 썼던 시가 그 이전 스무해 동안의 시보다 많았고, 평가도 좋았다. 당시 그의 소회. "머지않아 술은 나를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다. 한데 이상한 것은 술만 마셨다 하면 시가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다".

작품 세계에서도 시는 주요 화두였다.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며 '아비도 몰라본다'는 낮술을 찬양한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던 정현종이고, 술을 평생의 동반자로 택했던 천상병은 명정(酩酊)이라 불리는 만취 상태에서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며 환각 체험의 경지를 노래했다.

일찍이 주성(酒聖)으로 통했던 조지훈 시인의 '주도유단'(酒道有段)엔 18개의 음주 계단이 나온다. 마지막 단계는 열반주. 술로 인해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으로 명인급에 해당한다. 그 이상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란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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