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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환 ‘내 추억 속의 비틀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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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가요무대’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노래 제목이 뜻밖에도 ‘짝사랑’이란다. 그냥 ‘사랑’이나 ‘첫사랑’이라면 납득이 가겠는데 혼자서 애태우는 걸로 끝나버리는 ‘짝사랑’이라니…. 하기야 짝사랑은 들킬 염려도 적고 돈도 안 들고 상대를 무제한으로 바꿀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권할 만하다. 비틀스에 대한 사모의 기억도 결국은 짝사랑의 범주임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단 한 번 그들을 눈앞에서 본 적도 없고 그들이 날 알 리도 만무한데 나는 조금 전까지도 그들의 노래를 흥얼거렸으니 말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더니 해체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노래는 중년이 된 소년들의 가슴에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울려 퍼진다. 중학생이 되고 난 후의 일이니 1960년대 말이 배경이다. 돈암동시장에서 ‘배달소년’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내게 이웃 딸 부잣집 셋째 딸 인숙이 누나는 무료봉사 과외선생님이었다. 건전지의 직렬연결과 병렬연결의 차이를 설명해 주던 누나의 자상한 모습이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스라하다. 누나는 동네에서 이불 팔던 과부아주머니 외아들에게 시집갔고 난 막내동생처럼 자유로이 그 집에 드나들었다. 갓 결혼한 인숙이 누나 집에 놀러 가서 처음 비틀스를 만난 건 사춘기에 접어든 내게 일종의 ‘사건’이었다. 혼수로 가져간 게 분명한 광채 나는 별표전축에서 흘러나오던 ‘Hey Jude’를 평생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미자나 남진, 문주란, 정훈희, 그리고 당시 푹 빠져 있던 펄시스터즈의 음악과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하지만 매혹적인 선율, 특히 나중에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웅장한 합창의 마력이 나를 누나 집에 오래도록 머물게 했다. 신혼의 매형은 달갑지 않았을 텐데도 음악의 힘은 그런 시선을 가볍게 뒤로 물렸다. 들리는 대로 가사를 종이에 적어서 이를테면 조형기 팝송 부르는 식처럼 그저 수시로 따라 불렀다. 특히 ‘And anytime you feel the pain(언제나 고통의 순간이 오면)’ 부분이 감미로웠다. 그게 고통의 순간이라는 의미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필 더 페인(feel the pain)은 내 입가에서 엿기름처럼 달라붙어 떠날 줄 몰랐다.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나 느지막하게 군복을 입고 다시 그 노래를 들었는데 그때는 어이없게도 내가 Jude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미군부대에서 카투사로 근무할 때 막사를 같이 쓰던 미군병사가 날 만나면 항상 멜로디를 섞어서 Hey Jude라고 불렀다는 얘기다. 내 이름표에 적힌 성(Joo) 앞에 Hey를 붙여 Hey Joo를 부른다는 게 그처럼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은 호칭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Hey Jude don’t make it bad(언짢게 생각하지 마)’, 이따금은 ‘Hey Jude don’t be afraid(두려워하지 마)’, 또 가끔은 ‘Hey Jude don’t let me down(실망시키지 마)’이라고 재치 넘치게 변주했다. 그는 비록 일 년 근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노래(Hey Jude)는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선물로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과연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다. 인숙이 누나네도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필라델피아에서 억척스레 신발가게를 해서 꽤 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몇십 년이 지난 후 ‘TV는 사랑을 싣고’의 한 장면처럼 시애틀에서 누나 가족을 감격적으로 만났고 식사하면서 난 그 얘기부터 꺼냈다. 팝송을 들은 게 그때 처음이었고 그 시작은 바로 ‘Hey Jude’였다고. 비틀스의 음악은 내 인생 기억의 고리 역할을 충실히 했고 그래서 여전히 고맙고 편안하다. 교수로 근무할 때 자주 가던 이화여대 후문 맞은편 카페 상호가 마침 Yesterday다. 지금도 자주 가는데 술값도 저렴하고 안주 인심도 좋지만 역시 가장 큰 즐거움은 거기선 언제나 비틀스를 만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당연히 ‘Hey Jude’도 조용히 따라 부를 수 있다. 여기저기서 늙은 소년들이 부끄러움도 잊은 채 비틀스를 향한 순애보를 펼치고 있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위가 ‘Yesterday’였던 시절이 꽤 길었는데 어느 해부터인가 Abba의 ‘Dancing Queen’으로 바뀌었다. 서운한 맘이 아주 없진 않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천하의 비틀스가 순위에서 밀리다니. 하지만 지금 다시 투표해도 나는 ‘Yesterday’에 한 표 던질 참이다. 내일 일은 잘 모르겠고 난 그저 어제도 오늘도 Yesterday를 믿는 까닭일 것이다(I believe in yesterday). 


주철환 이화여대 교수, OBS경인TV 사장 역임. MBC PD 시절 ‘일요일 일요일 밤에’ ‘우정의 무대’ ‘퀴즈 아카데미 ‘대학가요제’ 등의 인기 프로그램을 연출했었다.


The Beatles - I Want To Hold Your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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