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새로운 평양 지도부가 가야 할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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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어제 이루어진 북한 노동당 고위 당직 개편은 ‘김정은 체제’로 가기 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차 인사포석이다. 핵심은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 2인자임을 분명히 한 후 나머지 간부들로 하여금 김정은을 사방에서 지원하는 인사 구도를 만든 것이다. 군대·내각·국가기관의 고위 인사들에게 걸맞은 당직을 분배함으로써 ‘혁명의 참모부’인 노동당의 위상을 다시 확립하면서 김정은의 당내 지위를 확고히 하겠다는 의도다. 내각 총리 최영림과 군총참모장 이영호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국가기관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장성택은 중앙군사위원으로 임명하는 식의 인사가 단적인 예다.

또 다른 특징은 어느 한 사람에게 ‘눈에 띄는’ 권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엇비슷한 규모의 힘을 주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었다. ‘수양대군’이 나올 수 있는 권력지형은 원천봉쇄하겠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김영춘의 오랜 부하였던 이영호를 김정은과 같은 급인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김영춘을 그 밑의 위원으로 보임한 것 등이 이를 반영한다.

‘견제’를 중시한 이번 인사로 북한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이런 인사시스템이 아무리 잘 굴러간다 해도 ‘김정은 체제’의 소프트 랜딩에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는 점이다. 북한이 직면하고 있는 국가적 난제(難題)들은 지도층 인사구조를 아무리 절묘하게 한다 하더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핵심 간부들이 김정은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다고 없는 식량이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평양지도부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지난해 10월 “북한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식량난으로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북한 언론매체도 최근까지 ‘식량문제 해결이 초미의 과제’라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의 시조인 김일성이 1962년 약속한 이밥(쌀밥)에 고깃국은 차치하더라도 김 위원장이 그렇게 아낀다는 인민들이 최소한 기아에서 헤매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새로운 정권을 등극시키겠다면 더욱 그렇지 않은가. 이를 위한 유일한 길은 북한이 국제사회에 편입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홍석형·태종수·김평해 등 경제관료들이 각각 정치국원, 당 간부부장, 당 비서 등 핵심 요직에 진입한 것은 주목된다. 대미(對美)외교에 정통한 강석주 전 외무성 제1부부장이 부총리에 이어 이번에 정치국원으로 승진한 것도 마찬가지다. 김 위원장은 지난 5월과 8월 두 번에 걸친 중국 방문을 통해 개방 의지를 보여주었고, 이들 관료는 김 위원장을 수행한 적이 있다. 과거에 도상계획으로 그친 개방 움직임이 이번엔 실행으로 옮겨지길 기대한다. 신의주 특구 등 개방과 핵 문제 해결을 통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만이 김정은 체제를 정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