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밥, 생각도 못한 슬로 푸드에 무릎친 뉴요커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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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국 뉴욕의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미국요리학교)는 ‘미국 최고의 요리학교’다. 16일(현지시간) 대한불교 조계종의 스님들이 그곳을 찾았다. 적문·선재·대안·우관·정관 스님 등 하나같이 ‘사찰음식의 최고수’들이었다. 그들은 CIA 교수와 학생을 상대로 한국사찰음식을 선보였다.

2시간 동안 직접 음식을 만드는 시연도 했다. 학생들은 충격을 받았다. 우엉을 다듬던 스님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건 2달러 주고 산 우엉이다. 그런데 불교에선 이걸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 언젠가 씨가 떨어졌고, 줄기와 뿌리가 자랐고, 농부의 손을 거쳐서 내게 온 우엉 생명이다. 우리는 그걸 ‘우엉 부처님’이라고 부른다.”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의 소호에서 ‘한국사찰음식의 날’행사가 열렸다. 선재 스님이 직접 만든 사찰음식을 미국인에게 건네고 있다. [조계종 제공]

미국은 물론 세계각국에서 모여든 수백 명의 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님은 말을 이었다. “우엉은 자라면서 흙과 물과 바람을 거쳤다. 흙과 물과 바람, 그 하나하나가 우엉이란 음식의 구성 성분(Ingredient)이다.” 그렇게 시연이 끝난 뒤 학생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주로 ‘요리에 대한 관점’과 ‘한국 불교’에 대한 물음이었다. CIA에 재학 중인 정재은(30)씨는 “외국인 친구들이 굉장히 새롭다고 했다. 특히 사찰음식이 자신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요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며 다들 놀랐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나흘 후를 위한 일종의 ‘탐색전’이었다. 조계종은 20일 오후 7시30분 뉴욕 맨해튼 소호의 스카이라이트에서 ‘한국 사찰음식의 날’행사를 열었다. 방미 중인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직접 현장을 찾았다. 종단 차원의 대대적인 행사였다. 이날 한국 사찰 음식은 미국땅을 처음 두드렸다. 블룸버그 뉴스편집장, CNN 뉴욕편집장, NYC-TV의 요리프로그램 진행자 켈리 최 등 300여 명이 초청됐다. 의례적인 정·관계 인사는 배제하고, 현지의 음식평론가·미디어 관계자·셰프 등이 행사장을 찾았다. 사회는 방송사 NY1의 뉴스 앵커인 비비안 리가 맡았다. 조계종 문화부장 효탄 스님은 인사말에서 “사찰 음식은 친환경적이다. 모든 생명체에 대한 감사와 화평이 사찰 음식에 녹아 있다”고 말했다.

행사장의 조명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사찰음식에 대한 영상이 상영됐다. 절집에서 스님들이 발우공양하는 모습과 새벽에 법고를 두드리는 장면 등이 소개됐다. 미국인 초청자들은 사찰음식의 배경이 궁금한 듯 유심히 영상을 따라갔다. 숭산 스님의 손상좌인 미국인 명행 스님(뉴욕 맨해튼 조계사)은 “앉아서 참선하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은 똑같다. 발우공양을 할 때는 묵언(默言)한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명상을 하는 것”이라며 “뉴요커에게 발우공양 명상을 가르치고 있는데 참 좋아하더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사찰음식을 보고 “예쁘다”“아름답다”를 연발했다. 음식은 단정하면서도 맵시가 있었다. 음식을 맛본 후에는 소감평도 밝혔다. 아시아요리 전문가인 CIA 마이클 퍼듀 부총장은 “ 우리는 예부터 내려오는 조리법을 모두 잊어버렸다. 그런데 한국사찰음식에는 수백 년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녹아있다”며 “미국 사람들은 짜고 달게 먹는다. 그래도 미국 사람 입맛에 맞추지 말라. 사찰음식은 계속 담백하게 가주길 바란다. 음식의 트렌드가 담백한 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한 달에 700만 명이 방문하는 음식 전문 웹사이트 푸드네트워크의 헤리어트 수 기자는 “한때 미국에선 패스트푸드를 빨리 먹는 게 유행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미국인이 음식을 천천히 먹는 걸 받아들이고 있다. 사찰음식은 그런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수백 년 전의 사찰음식 자체가 새로운 게 아니라, 요즘 시대에 새롭게 접해지는 것 같다”고 촌평했다.

요리평론가인 조 맥퍼슨은 “야채나 과일을 얇게 썰어서 튀긴 사찰음식이 좋았다. 그건 미국인들이 미식축구를 보면서도 즐길 수 있는 ‘친환경 칩스’다”라고 말했다. 각 테이블에 놓였던 설문지를 보면 연근삼색밥과 오미자차 등이 인기가 높았다.

행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더니 20대 후반의 여성 두 명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젊은이들의 시선이 궁금했다. “오늘 사찰음식이 어땠나?”하고 물었다. 그들은 “매우 흥미롭다. 맛도 무척 새로웠다. 그런데 아쉬웠다. 한국의 불교와 사찰음식에 대해서 미리 알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고 답했다. “만약 뉴욕에 한국사찰음식 레스토랑이 생기면 사람들이 갈 것 같은가?”라고 묻자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가 한국의 사찰 문화에 대해 더 많이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는 답이 돌아왔다. 미국인들이 목말라하는 건 ‘맛’이 아니라 ‘스토리’였다. 그들의 아쉬움은 ‘한국사찰음식의 맛’이 아니라 ‘한국사찰문화에 대한 이해’였다. 그건 한국사찰음식의 세계화를 위한 숙제이자, 가능성이기도 했다.

뉴욕=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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