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대를 잇기 위한 양자제도가 되레 가족관계를 망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19세기의 제사 장면. 서자는 장남이라도 제주(祭主)가 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유산 상속은 제사 상속에 따라붙는 권리였다. 적자(嫡子)가 제사를 통해 가계(家系)를 잇는다는 믿음은 서자를 배제하고 양자를 들이는 풍습을 만들어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양자로 들인 뒤 그자식에게 대를 잇게 하는 백골 양자, 대를 이을 손자를 낳아줄때까지만 양자 구실을 하는 차양자 등 양자의 종류도 많았다. [그림: 기산풍속도(캐나다 왕립온타리오박물관 소장)]

“시앗 싸움에 돌부처도 돌아앉는다(妻妾之戰 石佛反面)”는 옛말이 있다. 애정 싸움이 아니라 가사(家事) 지배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이었기에, 당자들은 모든 것을 걸었다. 주력 무기는 ‘아들’이었으며, 아들 없는 처는 아들 낳은 첩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참고 버티다 보면 통렬한 역전의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다.

남편이 병석에 누워 의식을 잃으면, 처는 문중에 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부탁한다. 문중 어른들은 이미 그 처가 오랫동안 공들여 온 사람들이다. 회의석상에서는 없던 얘기가 사실인 양 튀어나온다. 한 사람이 병석에 누운 ‘그’가 예전부터 종질(從姪) 누구를 양자로 들이려 했다고 운을 떼면, 그 친부(親父)는 얼마 전에 확약한 바라고 맞장구 친다. 금방 양자가 결정되고 첩과 서자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된다. 주자학적 정통론의 지배력이 커진 조선 중엽 이후, 양반가에서 서자로 대를 잇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고 입양이 일반화됐다.

1935년 여름, 당대의 전형적인 상속권 소송이 경남 산청 김참봉 댁 서자와 양자 사이에서 벌어졌다. 원고는 서자였는데, 그는 부친이 생전 유언으로 호주 및 재산을 자신에게 상속했음에도, 부친 사후에 가족들이 양자를 맞아들였으며 더구나 그 양자는 자기 친부모의 장남으로서 조선 관습상 자격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고소했다. 이에 대해 양자는 비록 양부가 정신을 잃은 상태였지만 가족들이 협의하여 입양을 결정했고, 자기 친부모의 동의를 얻었기 때문에 자격에 하자가 없으며, 특히 서자에게 호주 지위와 재산을 상속시키는 것은 ‘명문대가의 치욕’이라고 맞섰다.

일제는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대체로 조선의 관행을 인정하는 정책을 폈다. 지역 사회에 영향력이 남아 있는 양반들을 굳이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서자의 지위는 조금 높여주어 ‘유언양자’와 ‘사후양자’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 사건에서 핵심 쟁점이 된 것도 ‘사후’냐 ‘생전’이냐였고, 재판부는 입양일자와 김참봉의 사망일자를 대조하는 것만으로 피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축첩제도와 입양제도로 인한 분란은 가족관계 전반에 큰 상처를 남겼다. 적자와 서자 사이도 어색한 법인데, 법정에서 다툰 서자와 양자가 차례상이나 제사상 앞에 나란히 서기는 어려웠다. 축첩제도가 실질적으로 사라진 오늘날, 서자와 적자 사이의 분란은 아주 예외적이다. 반면 피 안 섞인 형제자매가 함께 사는 재결합 가정의 아이들이 늘고 있다. 가족 형태가 다양해지는 만큼 명절 풍습도 달라질 것이니, 어떤 ‘전통 의례’도 영구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