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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봤습니다] 박형수 기자의 우신고 비전 선포식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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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우신고 강당에서 ‘비전 선포식’ 행사가 열렸다. 이날 참여한 1학년 학생들은 학부모와 전교생 앞에서 자신의 비전을 선포했다. [김진원 기자]

고등학교의 진로 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뚜렷한 인생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온 학생이 대입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어서다. 서울 중동고는 1학년 때부터 진로를 정해 특성화된 과목을 수강하게 한다. 경기도 고양시 성사고는 ‘진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전문 교육을 실시한다. 진로 설정에 앞서 비전 교육부터 하는 학교도 있다. 올해 자율형 사립고가 된 서울 우신고는 1학년 전교생을 대상으로 비전 수업을 실시하고 선포식을 가졌다. 4일 열린 우신고의 비전 선포식 현장을 찾아가봤다.

글=박형수 기자
사진=김진원 기자

2주 동안 교육받으며 비전 만들어

“나의 사명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제때 치료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 고려대 생물학과에 진학해 공부한 뒤 2050년까지 암·에이즈 등 난치병 치료용 신약을 개발해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보급하겠습니다.”(조지웅)

“나는 소외계층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2020년까지 중앙대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2025년까지 공무원으로 일하며 실무 경험을 쌓아나갈 것입니다. 2035년부터는 소외계층이 필요로 하는 복지와 혜택을 실현시켜 나갈 것입니다.”(홍창우)

4일 우신고 1학년 학생들은 전교생 앞에서 자신의 비전을 선포했다. 부모님과 교장 선생님 사이에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의 비전을 읽어 내려가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정한 ‘나의 헌법’ 3개 조항까지 모두 발표를 마치자 옆에 서 있던 부모님이 대견하다는 듯 등을 두드려 주기도 했다.

이날 발표한 비전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2주 동안 16시간에 걸친 교육을 이수한 결과물이다. 시험 준비로 바쁜 고등학생들이지만 비전 교육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안병현군은 “한번도 비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어 무슨 수업을 받게 되는지 궁금하고 기대가 커 선배들에게 자주 물어봤다”고 말했다. 비전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강현숙 교사는 “1학기가 끝나갈 때쯤이면 학기 초의 다짐도 많이 해이해지고 분위기가 풀어지는데 비전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학습에 큰 방향을 잡아나가는 게 눈에 보인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안민규군은 “대통령이 돼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그는 “5월부터 무작정 놀고만 싶었는데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비전을 선포하고 나니 이를 현실화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진학 지도보다 진로 교육이 먼저

1학년 때 비전을 세우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강 교사는 “교사와 친구들이 각자의 인생 목표를 공유하고 나면 면학 분위기가 제대로 잡힌다”고 설명했다. 교사는 졸거나 딴짓을 하는 학생을 무작정 꾸짖기보다는 “장래에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려면 이 수업부터 똑바로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훈계하게 된다는 것. 학생들도 이런 지적을 받으면 흐트러진 행동을 하다가도 금세 멋쩍어하며 학습 태도를 다잡게 된다.

학부모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김영화(45·서울 신월동)씨는 “평소 어리게만 봤던 아들의 비전을 듣고 대견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자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엄마와 대화를 많이 안 하는데 학교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덕분에 아이의 생각을 심도 있게 알 수 있어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며 웃었다. 김현미(49·서울 구로1동)씨는 “아이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며 “전에는 아이가 앞으로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하면 철이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비전 선언문을 보니 나름대로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서 놀랐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I have a dream’으로 잘 알려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 동영상을 함께 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일로군은 “킹 목사가 자신의 비전을 선포할 때는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우리는 지금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보며 그의 비전이 실현된 걸 확인하고 있다”며 “영상을 보면서 내 비전도 꼭 이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벅찼다”고 말했다.

비전 선포식을 마친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비전 선언문이 담긴 기념 액자가 전달된다. 강사민 교장은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한 자신의 비전을 주변에 두고 항상 읽으며 가슴에 새기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비전 교육 커리큘럼= 우신고의 비전 교육은 1학년 1학기에 2주간 16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전체 교육을 이수한 학생들은 ‘비전 선언문’과 ‘나의 헌법’ 3개 조항을 작성해 전교생과 학부모 앞에서 비전 선포식을 한다. 비전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과 ‘시대적 과제’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 정한다. 우신고는 향후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보완해 ‘비전 콘테스트’를 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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