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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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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29면

파란 바탕에 빨강색 M. 요즘 런던에서 뜨는 메트로뱅크의 로고다. 문을 연 지 두 달밖에 안 됐다. 은행 냄새가 안 난다. 편의점 비슷하다. 쉬는 날은 크리스마스 등 1년에 딱 나흘뿐이다. 영업시간은 평일 오전 8시~오후 8시. 토요일은 오후 6시까지, 일요일은 오전 11시~오후 4시다. 다른 은행은 대개 평일 오후 4시까지만 한다.

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영업은 철저히 고객 위주다. 서비스가 타행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시장통엔 동전 세는 기계를 무료로 제공한다. 애완견을 데리고 온 고객을 위해 견공용 비스켓을 비치해 뒀다. 어린이용 캔디 박스를 둔 것은 물론이다. 깨끗한 화장실은 누구에게나 개방한다. 이게 먹혀들었다. 영국의 경제잡지 디렉터는 이를 ‘뉴 웨이브’로 표현했다.

이 새 물결, 국내에서도 본 듯하지 않나. 1980년대 신생 신한은행이 바로 한국 금융의 ‘뉴 웨이브’였다. 당시 금융권엔 고객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금융회사보다 금융기관이란 말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때 신한은 고객을 모셨다. 아주 작정을 하고서다. 출발은 일본식 인사였다. 창구 직원이 벌떡 일어나 손님을 맞았다. 처음엔 놀라서 나가버리는 고객도 있었다. 90년 동전교환기를 들고 시장통에서 동전을 바꿔준 것도 신한이 처음이었다.

그 서비스 체질,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남다른 훈련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전설적인 게 ‘맹폐(猛吠)’다. 맹렬히 짖는다는 뜻이다.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자신감을 갖게 하자는 일본식 연수 프로그램이다. 일렬로 죽 늘어서 소리를 지르는 연(連)맹폐와 싸움하듯 마주서는 대면(對面)맹폐가 있다.

신한은 호전적인 대면맹폐를 했다. 먼저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지도 걷어올린다. 다리를 앞뒤로 벌리고 엉거주춤하게 자세를 낮춘다. 이 상태로 서로 바짝 다가선다. 한쪽이 먼저 목청껏 고함친다. “자신 없으면 나가!” 그럼 상대가 맞받아친다. “못 나가! 너나 나가!” 그때부터 심판이 중지시킬 때까지 서로 맹렬히 짖어댄다. 말문이 막히거나 기가 꺾이거나 뒤로 물러서면 지는 거다. 침이 튀고, 눈물이 흐르고, 얼굴이 붉어지고, 목줄기 혈관이 부풀어 오른다. 투지·근성·담력·배짱을 키우자는 건데, 보기 아름답진 않다. 정신적 충격에 주저앉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폐지됐다.

신한의 ‘전사’들은 그렇게 길러졌다.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서비스를 하니 다른 은행들이 당할 재간이 없었다. ‘뉴 웨이브’가 아니라 ‘뉴 스톰(폭풍)’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최고경영진 셋이 싸운다. 거의 무협지다. 싸움 통에 고객은 안 보인다. 주인 싸움에 제3자가 왜 끼어드느냐고 할 수 있을까. 신한의 주인은 라응찬 회장이 아니다. 주주, 직원, 그리고 고객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주인이다. 17% 지분의 재일동포도 그 일부다.

신한은 이들이 합심해 키워가야 할 브랜드다. 그러기는커녕 그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 게 바로 내분의 장본인들이다. 그럼 셋 다 떠나는 게 낫다. 진짜 주인에게 맹폐당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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