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를 위한 변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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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31면

이인규(52·전 대검 중수부장) 변호사의 재임 시절 별명은 ‘재계의 저승사자’였다. 서울중앙지검 형사 9부장 시절, SK비자금 사건을 수사하면서 붙여진 것이다. 본인은 그 별명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내가 무슨 저승사자냐”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비리 의혹이 불거진 기업들을 수사해 처벌하는 것이 검사의 당연한 직무인데 어두운 이미지로만 비쳐질까봐 탐탁지 않아했던 듯하다.

On Sunday

이 변호사가 SK수사 과정에서 확보한 진술과 증거들은 2004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이른바 ‘대선자금 수사’의 단초가 됐다. 대선자금 수사는 노 전 대통령의 입지를 불안케 했다.

이 변호사는 검사였고 노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었다. 최고권력자로서 이 변호사를 미워할 만도 했다. 검찰 인사 때 검사장 한 자리쯤 탈락시켜도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재임 시 이 변호사는 검사장으로 승진했다. 이 변호사는 기자와 만나 “걱정도 했는데 (승진)시키더라”며 가슴 졸였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5년이 흐른 2009년 4월 이 변호사와 노 전 대통령은 대검 중수부에서 다시 만났고 그게 두 사람 인연의 끝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죽음으로써 ‘영원한 피의자’로 남았다. 검찰은 수사를 계속하려 했으나 천신일씨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면서 동력을 상실했다. 두 달 뒤 이 변호사가 검찰을 떠나고 중수부 수사팀 소속 검사들이 줄줄이 한직으로 밀려나면서 수사는 올스톱됐다. 그 후 1년여가 흐른 지금, 정치권에선 조현오 경찰청장의 차명계좌 발언을 계기로 특검 도입 찬반논쟁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 9월 5~6일자 중앙SUNDAY 1, 6면에 실린 이 변호사 인터뷰 기사는 이런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네티즌도 들끓었다. 특검을 해야 한다는 주장부터 이 변호사를 비난하는 내용까지 다양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차명계좌의 존부를 확인하기 위한 차원의 사실 조사는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재수사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변호사가 수사와 관련해 가슴속에 묻어놓은 뭔가를 끄집어내고 싶어하는 것도 개인적 욕심 때문은 아닐 것이다. 기사가 나가자 어떤 사람은 “중수부장 출신이 재임 중 알게 된 수사기밀을 퇴직해서 얘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힐난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초유의 사태다. 누군가 기록을 해야 한다. 지금 바로 여기에 사는 국민들이 실체를 알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봉인된 수사기록으로는 부족하다.

정치권이 논쟁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 변호사가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장을 만들어줘야 하는 건 아닌가. 청문회가 좋은 기회였지만 물 건너 가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살아난 사람들에 대한 수사는 재개돼야 한다. 혐의가 나왔는데도 그냥 덮어버리는 건 정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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