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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에밀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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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국립경주박물관은 1998년,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의 구성 성분을 분석했다. 그 결과 밝혀진 주재료는 구리(85%)와 주석(14%). 뼈의 성분인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유명한 ‘에밀레종’ 설화는 어찌 된 것일까. 많은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이 전설은 20세기 이전의 어떤 기록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이 성덕왕을 위해 구리 12만 근을 들여 종을 주조하다 완성을 보지 못했고, 아들 혜공왕이 771년 완성해 봉덕사에 안치했다’는 내용뿐이다. 신종을 기술한 고려·조선시대의 문건에서도 아기의 희생을 암시하는 구절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전설이 실린 가장 오래된 기록은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1906년 쓴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인 것으로 추정된다. 헐버트는 “조선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종에서 ‘에미, 에밀레(Emmi, Emmille)’라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이 말은 ‘엄마, 엄마 때문에’라는 뜻이다”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문제의 종이 있는 곳은 경주가 아니라 서울 한복판이다.

성덕대왕신종이 곧 에밀레종이라는 주장은 192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함세훈의 친일 희곡 ‘어밀레종’(1942)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에밀레종 전설은 한민족의 유산을 폄하하려는 일제의 조작이란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반면 역사소설가 문영은 중국 당나라에도 유사한 설화가 있음을 지목한다. 인명을 경시하는 학정에 대한 고발의 메시지가 인신공양 설화로 바뀌었을 거란 추정이다. 그만한 역사(役事)라면 피는 몰라도 눈물은 수없이 흘렀을 테니, 종소리가 원망하듯 슬프게 들렸을 것도 당연한 일이다.

지난 7일 충남 당진에서 한 젊은이가 섭씨 1400도의 용광로에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뒤, 한 무명 네티즌이 쓴 조시가 인터넷을 타고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고 있다. ‘그 쇳물 쓰지 마라/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그 쇳물은 쓰지 마라/(중략)/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정성으로 다듬어/정문 앞에 세워 주게/가끔 엄마 찾아와/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 보자 하게’. 종소리처럼 퍼지며 눈물을 자아내는 이 조시가 부디 생명 존중과 사고 방지의 뜻을 널리 널리 전파했으면 한다.

송원섭 JES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