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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아, 카잔차키스 ! 오, 조르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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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도스토옙스키·헤세·괴테도 읽었지만, 우리 중·장년 세대가 세상을 알 무렵 만난 게 카잔차키스야. 내 경우 30대 시절의 방황을 잡아준 건 다름 아닌 『영혼의 자서전』 『그리스인 조르바』이었어.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대.”

치명적인 조르바 영혼에 붙들린 이가 한 둘이랴? 방송인 정은아도 “『그리스인 조르바』는 2~3년 마다 되읽는 보약”이라 했던 걸 전해 들었다. 그게 조르바다. 견주자면 성장소설 『데미안』 주인공은 그저 사춘기 형이고,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는 극히 비현실적 캐릭터다. 서구문학은 나약하거나, 아니면 병적인 인간형을 양산해왔는데, 조르바는 예외다.

일자무식, 그럼에도 그는 “진정 살아있는 가슴과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을 가졌다. 동시에 대지와 탯줄로 연결된 사내다. 게릴라·광부 등 안 거쳐본 게 없지만 까짓 세상일은 몽땅 내려놓고 산다. 그런가 하면 “여자는 영원한 비즈니스”라며 암컷(소설의 표현) 꽁무니를 그토록 따라다닌다. 시인 문정희의 표현대로 “요즘은 멸종위기인 멋진 잡놈”으로 딱이다. 그걸 담아낸 소설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60대의 조르바와, 그에 매료된 서른다섯 살 젊은 두목이 광산업에 뛰어들었다가 몽땅 들어먹고 만다는 얘기다. 감상 포인트는 조르바가 토해내는 우렁우렁한 사자후다.

반면 두목은 지독한 먹물. 단테·말라르메를 줄줄 외고, 불경 읽기에도 열심인데, 젊을 시절 구도의 길을 걷던 카잔차키스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조르바를 만나 삶이 180도 바뀐다. 한 번도 피가 끓어본 일도, 누굴 사랑해본 일도 없는 자기란 결국 ‘발기불능의 이성’ 신봉자였음을 깨닫는다. 그의 표현대로 조르바학교에 입학해 ‘삶의 알파벳’을 다시 배웠다. 이 소설은 앤소니 퀸의 영화로 유명한데, 파산 뒤 해변에서 덩실덩실 자유의 춤을 추던 명장면을 기억하는 이도 많다. 그는 실존인물.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호머·베르그송·니체·부처와 함께 자기 삶의 다섯 스승이라고 털어놓을 정도다.

불멸의 조르바는 이제 보통명사가 됐다. 자유의 삶을 뜻하는 조르비즘(조르바주의)란 신조어가 나온 지도 오래다. 맞다. 그는 니체의 초인과 닮았고, 처성자옥(妻城子獄)이라는 ‘모눈종이 위의 삶’을 벗어난 동양의 방외지사(方外之士)와 다를 게 없으니 가슴 뛰는 삶의 위대한 표상이다. 카잔차키스는 반기독교 성향 때문에 노벨문학상에 거푸 미끄러졌지만, 그게 대수랴? 조르바는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지쳤을 때, 그리고 “이게 삶의 전부인가?” 싶을 때마다 새롭게 만나는 우리의 친구다. 그를 뜨겁게 만나게 해준 두 분(이윤기·안정효)에 대한 고마움은 그 때문이다. 아, 카잔차키스! 오, 조르바!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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