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한국인은 용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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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뒤뚱거리는 차를 겨우 달래 후미진 곳에 세웠다. 6시34분 곤파스가 강화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들었지만 그것뿐, 태풍경보가 발령됐다는 소식은커녕 어떻게 대처하라는 얘기도 없었다. ‘시선집중’의 손석희 교수가 바쁘게 태풍 상황을 타전하고 있었다. 가로수와 전신주가 넘어진 곳, 길이 막힌 곳, 파손된 유리조각과 기왓장이 날려 위험한 곳을 속속 중계했고, 지하철이 섰으니 출근 시각을 조정하라는 요령도 알렸다. 손석희 교수가 기상청 관계자를 불렀다. “해수면 온도 때문에 가속도가 붙은 곤파스가 예상 시각보다 일찍 상륙했다. 주의를 요한다”는 게 답변이었다. 충남 해안과 태안반도를 사정없이 후려친 곤파스가 이제는 무방비 상태인 서울을 마음껏 유린(蹂躪)하고 있을 때였다. 교과부에서 등교시간을 늦춘다고 발표한 시각은 8시, 더러는 자식들을 위험지대로 배웅하고 난 후였다.

25년 전 여름, 미국 보스턴에서 겪었던 일이다. 초속 50㎞의 강력한 돌풍을 동반한 허리케인이 보스턴으로 급상승한다는 예보가 발령되자 각 기관은 대책회의를 열어 휴무(休務)를 결정했다. 대학도 휴교조치가 취해졌다. 긴급사태에 대비해 식량과 양초를 준비하고, 창문에 테이프를 붙이고, 취약한 곳을 미리 손봐 두라는 대처 요령도 알렸다. 준비를 마친 사람들은 집 안에 꼭꼭 들어앉아 그 악명 높은 바람을 기다렸다. 마치 명사(冥뵨) 방문을 축하하듯 친지들과 함께 맥주 파티를 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바람은 보스턴에서 100여㎞ 떨어진 내륙도시로 방향을 틀었고 인근의 애팔래치아 산맥에 부딪혀 죽었다. 사람들은 괜히 호들갑을 떨었다는 듯 머쓱하고 허전해 했다. 그 호들갑 덕분에 인명도 재산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한국의 기상청이 점친 곤파스 상륙 시각은 2일 정오, 그러곤 새벽 6시에 황급히 태풍 경보로 바꿨다. 서해안 지역이 강타(强打)당한 뒤의 늦은 조처였다. 기상청 산하 ‘중앙재해대책본부’는 태풍경보를 발령했을 뿐 기본적 대처 요령을 미리 알리지도 않았고, 그 흔한 문자메시지를 활용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시민들끼리의 소통수단인 트위터가 정부 부재(不在) 공간을 종횡으로 누볐다. 2004년 효율적인 재난관리를 위해 통합기구로 발족한 소방방재청은 모든 정보를 기상청에 의존하고 있기에 변덕스러운 태풍에 맞설 능력이 없다. 방재청 산하 ‘국가재난정보센터’가 제공한 정보를 믿고 있다간 재난을 불러들이기 십상이다.

필자가 상황이 종료된 3일 오전에 홈페이지를 확인해 봤다. 시간대별 ‘곤파스 상황보고’가 이랬다. # 2일 새벽 5시 태풍 속보: ‘03시 현재 군산 서북서쪽 110㎞ 해상에서 북북동진 중이며, 2일 08시쯤 강화도에 상륙예정’(이 시각엔 태안반도를 휩쓸었다). # 새벽 06시: ‘05시 현재 서울 서남서쪽 95㎞ 해상에서 북북동진 중이며, 08시쯤 강화도 상륙 예정’(곤파스는 이미 서울을 때리기 시작했다). # 아침 8시: ‘위와 같음’(서울은 이미 쑥대밭이 된 후였다). 그 시각, 시민들은 거센 바람 속에서 출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왜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재난안전정부는 보이지 않았다.

한반도의 여름은 태풍의 역사다. 1794년 정조 41년 8월, 엄청난 태풍이 불어 충청도 해안지역에서 116명이 익사(溺死)하거나 기왓장에 맞아 죽자 임금이 탄식했다. “사망자가 그리 많으니 놀랍고 측은하다. 구휼(救恤)을 빨리 시행하라. 그리고 장계를 아직 올리지 않은 충청도 관찰사를 징계하라.” 그렇다면 인공위성이 떠 있는 오늘날 5명 사망, 160만 가구 정전, 막대한 농가 피해와 건물 파손은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누굴 징계할까? 첨단장비와 수백의 전문가를 보유한 재난관리기관들의 태만과 느릿한 오보(誤報) 덕분에 시민은 무지(無知)하고 용감해야 했다. 그 용감한 한국인과 대적하러 또 하나의 태풍이 북상 중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