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시계태엽 오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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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시계태엽 오렌지
앤서니 버지스 지음, 박시영 옮김
민음사, 236쪽, 8000원

▶ 영화 "Clockwork Orange" 포스터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그건 은밀한 공모 같은 것이었다. 독립운동이라도 하듯 쉬쉬하며 서울 대학로의 한 구석진 카페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장맛비 쏟아지는 스크린을 두시간 넘게 지켜봤다. 투박한 영국 억양은 도통 이해가 안됐다(영국에 유학을 갔다온 선배도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자막은 물론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알음알음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영화. 아니, 그런 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적인 자존심을 세울 수 있던 영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A Clockwork Orange'는 1990년대 초반 이 땅의 영화 매니어에게 하나의 전설이었다.

71년 영화가 나오자마자 영국은 극단적인 폭력 묘사를 이유로 수십년간 상영을 금지했고, 미국에선 X등급 판정을 내렸다. 반면에 뉴욕 비평가협회는 같은해 작품상과 감독상을 줬다.

전세계가 영화 한편을 놓고 논쟁을 거듭할 수록 영화에 열광하는 부류도 늘어났다. 영화가 불법 판정을 받은 나라에서도, 그러니까 우리나라 같은 나라에서도 비디오테이프로 불법 복사된 영화는 전염병처럼 옮아갔다.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이 이제서야 번역돼 나왔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112번째 작품이다. 그러나 옛날의 영화광에게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제목은 어딘가 낯설다. 'Clockwork Orange'를 발음할 때의 전율 같은 게 없다. 미성년자 땐 몰래라도 훔쳐봐야 했던 성인영화를, 막상 성인이 되어선 시시해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리라. 그래도 소설은 영화처럼 선명하고 강렬하다. "원작에 최대한 충실했다"는 감독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이야기는 크게 둘로 나뉜다. 15살짜리'알렉스' 패거리가 벌이는 천하의 몹쓸 짓이 전반부 이야기다. 그들은 별 이유도 없이, 아무나 때리고 죽이고 여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는다. 후반부엔 경찰에 체포된 알렉스가 고문에 가까운 교화 프로그램을 받는 과정이 나온다. 가해자 알렉스의 폭력도 잔인하지만, 피해자 알렉스의 폭력, 다시 말해 알렉스가 교화를 받는 과정 또한 끔찍하다.

말하자면'시계태엽'은 사회 규범을, '오렌지'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저자 앤서니 버지스(1917~1993)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사회 규범의 폭력성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건 맞지만, 인간의 자유의지 또한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그래서 '오렌지'가 아닐까. 모든 오렌지가 달콤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번역본이라 큰 상관은 없겠지만, 저자는 알렉스 패거리가 쓰는 언어를 새로 만들어냈다. 런던 지역의 속어에 러시아어를 섞어 그들만의 언어를 창조했다. 그래서 영국에서 공부하고 온 선배도 그때 '리스닝'이 안됐던 게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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