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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천대받은 세계적인 과학두뇌, 김감불과 김검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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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일본이 조선에서 들여온 회취법을 이용해 은을 제련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 오른쪽 아래는 일본인들이 조선 인삼 등 수입품 대금 결제용로 주로 쓰던 은 덩어리인 정은(丁銀). (사진 출처 :『江戶時代館』, 일본 쇼각칸 발행)

1503년(연산군 9) 조선에서는 세계 광업사상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었다. 은광석에서 납(鉛)을 제거해 순은을 추출하는 제련기술이었다.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재를 둘러놓고 은광석을 채운 다음 깨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불을 피워 녹이는 것이 핵심이었다.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또는 회취법(灰吹法)이라 불렸던 그것은 당시로는 최첨단 제련술이었다.

기술 개발의 주인공은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장예원(掌隷院)의 노비 김검동(金儉同)이었다. 일찍부터 중국의 은 징색(徵索)에 시달렸던 데다 천한 신분의 인물들이 개발한 것이라서 그런지 조선에서는 이 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16세기 중엽 조선을 드나들던 일본 상인들이 조선 장인을 ‘스카우트’해 관련 기술을 일본으로 빼돌린다. 16세기 판 ‘첨단기술 유출’이었다.

당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맞아 재정 확보에 열을 올리던 일본의 다이묘(大名:넓은 영지를 가진 무사)들은 경쟁적으로 이 기술을 활용했다. 전국적으로 은광 개발의 붐이 일었고, 16세기 후반 일본의 은 생산은 전 세계 총량의 3분의 1을 점하는 수준까지 높아졌다. 조선 침략을 자행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된 돈줄 또한 은광 개발이었음은 물론이다.

은광 개발에 소극적이었던 조선은 임진왜란을 맞아 곤혹스러운 처지로 내몰린다. 조선에 참전했던 명군이 은을 화폐로 사용했던 데다 조선 정부에 은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명군 장병들은 월급을 은으로 받았고, 모든 거래를 은으로 했다. 그들이 민가에 나타나 은을 내밀며 술과 고기를 달라고 했을 때 조선 백성들은 손사래를 쳤다. 은을 이용한 거래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군 장졸들은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명군 장수들은 본국에서 기술자를 데려와 은을 채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들은 ‘부의 원천’인 은광 개발에 소극적인 조선 군신들을 질타했다. 조선 조정은 뒤늦게 은광 개발을 시도했지만 제대로 된 기술자를 구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터라 관련 기술이 제대로 전승되지 않았던 것이다.

16세기 이후 은은 오늘날의 달러처럼 세계의 기축통화였다. 무역을 통해 전 세계의 은을 흡수했던 중국과 은을 다량으로 캐냈던 일본이 번영했던 것은 다 까닭이 있었다. 조선은 첨단기술로 남 좋은 일만 시킨 셈이다. 징색에 대한 피해의식과 16세기 이후 심화된 장인에 대한 천대가 맞물려 빚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이공계 푸대접’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여전한 오늘,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