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기획] 이선진씨 컵라면 뚜껑 270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낯선 동네에서 구멍가게에 들어갔는데, 이상한 컵라면들이 쌓여 있는 거예요. 허겁지겁 주워들었죠. 그런데 바로 그때 잠이 깨고 말았어요. 어찌나 아쉬웠는지…."

이선진(22.실내 디자이너)씨의 꿈 얘기다. 이씨는 '컵라면 뚜껑 매니어'다.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 이씨는 컵라면 뚜껑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수집까지 한다.

이씨의 관심이 컵라면 뚜껑에 꽂힌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이던 4년 전. 미대 입시학원에서 늦도록 그림을 그리던 이씨는 컵라면을 자주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젓가락을 들고 막 먹으려는데 뚜껑이 눈에 들어왔다. 동그란 모양에 알록달록한 무늬. 자세히 보니 귀여웠다. 이날로 이씨는 뚜껑 수집을 시작했다.

시계추처럼 오가는 고3 학생이 다양한 컵라면을 수집하기는 쉽지 않았다. 늘 같은 편의점이나 수퍼마켓만 가게 되기 때문. 그래서 이씨는 다른 동네에 갈 때를 노렸다. 친구나 친척집에 갈 일이 있으면, 새로 나온 컵라면을 찾아 동네를 헤매고 다녔다.

대학에 들어와 이씨의 '뚜껑 사냥'은 활기를 띠었다. 진작에 만들어 놨던 인터넷 카페 '사발면 뚜껑 수집 동호회(cafe.daum.net/tookung)'의 회원들과 본격적으로 정보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변에도 뚜껑을 모은다는 사실을 알려 흔치 않은 컵라면을 보면 '신고'하게 했다. 이런 노력에 감동(?) 받았는지 한 선배는 입대한 뒤 보급 나온 컵라면 뚜껑을 모아 보내줬고, 외국에 사는 친척은 현지 컵라면을 보내줬다. 이씨는 라면회사에 e-메일을 보내 단종된 라면의 뚜껑을 받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모은 컵라면 뚜껑이 270여 점. 무슨 컵라면 종류가 그리 많은가 싶지만 알고 보면 같은 제품이라도 가격이 오를 때마다 뚜껑 디자인이 조금씩 바뀐다. 또 다른 나라로 수출될 때도 새로운 디자인의 뚜껑이 나온다. 여기에 명멸하는 수많은 중소 라면업체 제품까지 치면 국내 컵라면 뚜껑 종류만도 거의 무한하다. 재미있는 수집거리인 셈. 이 재미에 끌린 네티즌 4000여 명이 이씨의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다.

그런데 막상 이씨는 한동안 컵라면 뚜껑을 모으지 못했다. 취업 준비 때문. 인터넷에서 컵라면 정보를 계속 챙기고는 있었지만, 구하러 다닐 만큼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 이씨는 다음달 졸업을 앞두고 이달 초 취업에 성공했다. 아직은 배울 게 많은 병아리 사원. 그래도 이씨의 마음은 다시 뚜껑을 모을 생각에 들떠 있다.

"조만간 중국 출장 갈지도 모르거든요. 가면 틈나는 대로 대형 할인점 같은 데 가려고요. 여러 종류의 중국 컵라면 뚜껑을 챙겨 와야죠.(웃음)"

글=남궁욱 기자<periodista@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