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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80) 옌바오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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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겨울, 마오쩌둥의 마지막 모스크바 방문을 수행한 옌밍푸(오른쪽 셋째). 홍색공주 쑨웨이스(오른쪽 넷째)와 마오(오른쪽 다섯째)의 경호원이었던 태극권의 고수 리인차오(왼쪽 첫째)의 모습도 보인다. 김명호 제공

일본군의 만주 침략과 장쉐량의 연금은 국민당 고관 옌바오항을 중공 비밀당원으로 변신시켰다.

1929년 영국에서 귀국한 옌바오항은 추억의 ‘펑톈(奉天) YMCA’를 노크했다. 미국인 총무는 기독교도가 되어 돌아온 옌에게 총무직을 넘겼다. 부친이 일본군에게 폭사 당한 후 동북의 군정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쉐량은 최초의 중국인 총무를 위해 사옥을 지어줬다.

옌바오항은 YMCA를 중심으로 반일 선전과 마약퇴치운동을 벌였다. 당시 동북에 와있던 일본 건달들 중에는 아편장수들이 많았다. 관동군 관할 구역인 남만주철도 연변에 간판까지 내걸고 모르핀과 헤로인을 팔았다. 중국인들은 눈깔사탕보다 아편 구하기가 더 쉬웠다. 중독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옌은 발뺌만 하는 경찰들을 설득하고 학생조직을 동원했다. 487부대의 헤로인과 아편 400냥을 압수해 외국 영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소각했다. 이 사건은 옌을 전국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은 선양 점령 이튿날 옌바오항에게 현상금 5만원을 내걸었다. 초대 중공 당수에게 걸렸던 현상금이 2만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동북에서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옌바오항은 목사 복장에 성경책을 끼고 동북을 탈출했다. 그해 겨울 베이징에서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유린당한 동북의 광복을 기원하며 밍푸(明復)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1934년 장시(江西)성 난창에 공비 섬멸 총지휘본부(南昌行營)를 설치한 장제스는 ‘신생활운동’을 선언했다. 본인이 ‘신생활운동 촉진회’ 회장을, 쑹메이링은 지도장(指導長)을 맡았다. 거짓말과 둘러대는 재주를 겸비한 인간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쑹은 장쉐량에게 괜찮은 인물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장쉐량은 옌바오항을 소개했다. 중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했고, 기독교도가 아니면 사람으로 치지도 않았던 쑹은 영문 성경을 줄줄 외워대는 옌을 촉진회 서기 겸 총간사로 천거했다. 장제스는 집무실에 책상을 한 개 더 들여놓고 옌바오항에게 육군 소장 계급장을 달아줬다.

최고 지도자 부부의 측근이며 2인자 장쉐량의 친구이다 보니 중통(中統: 국민당 정보기관)과 군통(軍統: 군사위원회 정보기관)의 책임자들도 옌바오항 앞에서는 눈치를 봤다. 고관 부인들은 옌에게 잘 보여야 쑹메이링과 차라도 한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36년 겨울, 장쉐량의 동북군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시안(西安)사변은 항일전쟁을 위한 국·공 양당의 합작에는 성공했지만 장쉐량은 연금 상태로 전락했다. 옌바오항은 장쉐량을 구하기 위해 장제스를 세 차례 찾아 갔다. 모두 거절당했다. 면회는 허락 받았지만 특무들이 둘러싸는 바람에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30분간 엉엉 울며 악수만 하다 장쉐량과 헤어진 옌바오항은 저우언라이를 찾아갔다. “우리 동북인들은 싸움에는 능하지만 정치에는 소질이 없다”며 공산당 입당을 자청했다.

중공은 코민테른의 지부였다. 옌바오항의 입당은 대형 사건이라 허락이 필요했다. 코민테른은 “국민당의 고위직에 있는 반동분자” 라며 반대했다. “중국인들은 다섯 살짜리 애들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며 저우언라이의 속을 확 긁어댔다.

당내에도 “인간 관계가 복잡한 사람이라 믿을 수 없다”며 재고를 요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네 말이 맞다. 너처럼 단순해야 한다. 옌바오항이 할 수 있는 일을 네가 할 수 있을지 잘 생각해 봐라”며 한숨을 내뱉었다. 저우는 옌바오항을 비밀당원으로 입당시켰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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