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63) 빨치산 소탕 ‘D데이 H아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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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950년 11월 지급된 방한복을 입고 있는 국군 병사의 모습이다. 이듬해 11월에 펼쳐진 지리산 토벌대도 이런 방한복을 입고 빨치산과의 전투에 나섰다. 지리산 토벌대는 산에 오를 때 흰색과 빨간색의 표식을 등에 부착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의 자료를 작가 박도씨가 엮어 펴낸 『한국전쟁Ⅱ』(눈빛)에 실려 있다.

나는 사실 지리산에 남은 빨치산이 얼마 없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대규모로 군대와 경찰 병력을 동원했는데 막상 빨치산은 지리산에서 이미 빠져나간 상태라면 허탕을 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부대의 모든 움직임은 극도의 보안 속에서 이뤄졌다.

다행히 빨치산은 이번 대규모 작전의 의미를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였다. 주력 부대를 비롯한 상당수 빨치산이 빠져나가지 않고 지리산에 계속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칫 국군의 정규 2개 사단을 비롯한 많은 병력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먼저 알았다면 빨치산은 지리산을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도주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지리산 인근에 있는 마을의 전화선을 모두 절단했다. 마을과 마을끼리의 통화선을 잘라 국군과 경찰이 움직인다는 사실이 누설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1951년 11월 말이 되자 내가 이끄는 ‘백 야전전투사령부’ 본부는 조용히 전주를 떠나 남원으로 이동했다. 이때에 맞춰 작전 지역에 있는 모든 마을의 민간 전화선을 절단한 것이다.

D데이 H아워(작전 개시일시)를 12월 2일 오전 6시로 최종 결정한 뒤 12월 1일 0시를 기해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대전 이남 모든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토벌을 주도했던 수도사단과 8사단은 이미 자리를 잡은 뒤였고, 그 뒤에서 빨치산 퇴로를 막아야 했던 예비 3개 연대와 전투경찰 3개 연대도 정해진 위치에 배치됐다.

전주북중에 사령부 본부 요원들이 머무는 동안에도 낮 시간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어두운 밤이 찾아온 뒤에야 보급과 연락을 위해 움직였고, 교실 창문에는 담요 등을 걸어 불빛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했다.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잠도 교실의 책상을 이어 붙여 놓은 침대 위에서 잤다. 식사가 부실했던 데다 밤새 떨면서 잠을 자야 했으니 나름대로 고생을 했던 셈이다.

빨치산도 나름대로 국군의 토벌을 예상했을 것이다. 지리산이 옷을 벗는 가을과 겨울이 오면 으레 국군과 경찰이 토벌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우리 부대가 이동했던 사실도 빨치산이 전혀 몰랐으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 부대 이동의 규모 등은 우리가 나름대로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던 덕분에 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토벌을 펼치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지리산은 결코 어려웠던 작전 지역은 아니었다. 지리산은 일제(日帝)시대에 경성(京城)제국대학과 규슈(九州)제국대학, 교토(京都)제국대학 등의 연습림(練習林)이 들어섰던 지역이다. 각 대학교의 농과대학 실습을 위해 조림장이 들어섰던 곳으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나무들이 제법 많았던 곳이다. 그러나 수종(樹種)은 대개가 활엽수(闊葉樹)였다. 가을이 오면 여지없이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나무들이어서 그 숲은 빨치산이 숨어 있기에는 부적절한 곳이었다.

아울러 해발 1500m 이상의 지역에는 큰 나무가 자라지 못했다.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는 계절에는 그곳에 장기간 숨어 있는 게 불가능했다. 지리산이 그때까지 빨치산의 주요 무대로 여겨지기는 했지만 객관적인 여건으로 보면 그들에게 그리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은 산세(山勢)가 깊었다. 아울러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군사용어로 말하자면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를 좌지우지하기 좋았던 일종의 ‘감제(瞰制)고지’였던 셈이다. 감제고지는 높은 지역에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면서 작전을 펼치기 쉬운 곳으로 군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하게 취급을 받는다.

빨치산 부대는 이 지리산을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서 영남과 호남을 넘보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넓은 호남벌의 곡창을 엿볼 수 있었고, 경부선과 전라선의 철도와 그 주변을 지나는 모든 국도를 넘나들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남부로 통하는 대한민국의 동맥(動脈)은 자주 끊겼다. 이들이 출몰하면서 말썽을 부린 지역에서는 사람과 물자의 통행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군은 38선을 중심으로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맞아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전선으로 향하는 보급선이 자주 불통(不通) 상황에 빠지면서 그 전선에서의 싸움마저 차질을 빚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51년 말에 펼쳐진 대규모 토벌은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벌인 작전이었다. 그 규모로 따지면 당시의 토벌은 세계적인 수준이기도 했다. 비공산진영에서 벌어진 대(對)게릴라작전 중에서는 손꼽히는 규모였던 것이다. 빨치산이 이를 사전에 인지하고 도주한다면 작전은 절반의 성공에도 미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우리는 그렇게 밤안개가 둘러싸듯 지리산을 감싸면서 진군했다. 살며시 소리 없이 퍼져 나가는 밤안개처럼 우리는 지리산 주변에 다가섰지만 남원 사령부에 몸을 둘 무렵의 나는 적들이 ‘혹시 작전 규모를 미리 알아채고 도망친 것은 아닐까’라는 조바심에 휩싸이기도 했다.

나와 48년의 숙군 작업에서 시작해 6·25전쟁 초반까지 함께 작전을 펼치면서 평생의 동지가 됐던 김점곤 당시 대령은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와 있었다. 대구 육군본부에서 내가 지리산으로 향할 무렵 나는 그에게 함께 동행하자는 뜻을 전했고, 김 대령은 그런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터였다. 그는 지리산 주변에서 펼쳐지는 모든 작전을 통합하는 참모장이었다. 노련한 전략가답게 그는 지리산 주변의 적정을 제대로 꿰고 있었다.

D데이를 앞두고 은밀하게 작전 상황을 검토하고 있을 때 김 대령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내가 묻자 김 대령은 “김성수 부통령께서 친필 서한을 보내왔다”고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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