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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 키즈’ 초청 내일의 富를 선점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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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27면

영국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은 최근 중국 등 아시아 부호들을 유치하기 위해 2세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사진은 스탠다드차타드의 홍콩 센터. [블룸버그]

지중해 양식 건물로 유명한 싱가포르의 래플스 호텔. 이달 13일 저녁 이곳 다이닝홀에선 작지만 품격 있는 파티가 열렸다. 영국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이 연 만찬이었다. 하루 뒤인 14일 블룸버그 통신은 그날 만찬이 ‘프라이빗뱅킹 고객을 위한 파티’라고 전했다. 은행에 목돈을 맡긴 고객을 위한 사은잔치였던 셈이다.

메이저 은행들, 아시아 부호 2세 잡기 경쟁

그런데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고 블룸버그는 보도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모두 10대 후반,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젊은 시절 열심히 그리고 기민하게 움직여 재산을 불린 뒤 여유로운 삶을 즐기려는 50대나 60대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아시아계였다. 스탠다드차타드 쪽은 “아시아지역 프라이빗뱅킹의 차세대 고객을 위한 파티”라고 설명했다. 아시아 백만장자 2세나 3세를 위한 만찬이라는 얘기다.
스탠다드차타드는 한국·중국·인도·싱가포르 등의 프라이빗뱅킹 고객 가운데 재산이 ‘일정 수준’ 이상 된 사람들의 자녀(백만장자 키즈)를 초청했다. 은행 쪽은 “최소 100만 달러(12억원)를 우리에게 맡긴 고객의 자녀들을 초청했다”며 “참가자들의 절반 이상은 1000만 달러(120억원) 이상이었다”고 귀띔했다.

스탠다드차타드는 백만장자 키즈를 데려다 단순히 먹이고 재우며 접대만 한 것이 아니었다. 6주짜리 경영전략 프로그램을 짜 그들을 교육시켰다. 그들을 피교육자로만 취급한 것도 아니었다. 월 967달러(114만원)를 주면서 백만장자 키즈를 인턴 직원으로 대우했다. 스탠다드차타드는 ‘우리 은행을 위해 인수합병(M&A) 대상을 찾아 추천하라’고 참가자들에게 주문했다.

백만장자 키즈는 M&A를 할 만한 기업 100여 곳씩을 살피고 분석했다. 필요하면 부모의 정보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예닐곱 곳을 M&A 대상으로 제안했다. 스탠다드차타드는 그들이 골라 제안한 회사들을 다시 분석해볼 요량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진짜 매력적인 곳이 있다면 실제로 M&A를 추진할 예정이다.

스탠다드차타드는 최고 펀드매니저와 임원 등이 직접 강사로 나서 백만장자 키즈에게 글로벌 경제·경영 상황을 브리핑했다. 키즈는 스탠다드차타드 최고 두뇌의 조언을 받아 재테크 전략을 짜보기도 했다. 중국 백만장자 전문 매체인 후룬 리포트는 “참가자들은 부모 재산을 물려받은 뒤 자신이 벌일 사업을 설계하듯이 은행이 내준 과제를 성실히 수행했다”고 이달 15일 보도했다.

스탠다드차타드 관계자는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아시아 부호들의 최대 관심사는 2세 교육과 훈련”이라며 “그들은 단순히 돈을 물려주기보다는 비즈니스 감각과 노하우, 지혜를 전수해주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혈통과 가문 중심인 아시아 부호들의 생리를 활용한 프라이빗뱅킹 마케팅인 셈이다.

스탠다드차타드만이 이런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게 아니다. 미국 시티그룹과 스위스 은행그룹 UBS, 크레디트스위스 등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은행마다 교육 내용이 조금씩 차별화돼 있다. 스탠다드차타드는 철저하게 현장 실습을 중시한다. 시티는 비즈니스 전략 수립과 재산 관리 외에도 부모의 기업을 물려받았을 때에 대비해 대중 연설을 어떻게 하는지도 교육시킨다.

스위스 비밀계좌를 상징하는 UBS는 최소 480만 달러(57억원)를 맡긴 부호의 자녀만이 프로그램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은행 프라이빗뱅킹 부문의 아시아담당인 대니얼 해럴은 후룬 리포트와 인터뷰에서 “차세대 부호를 위한 우리 프로그램은 나중에 물려받을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불려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덤으로 UBS는 리더십 교육과 자기계발 과정도 함께 제공한다.

전문가들은 메이저 은행들의 부호 2세 교육 프로그램을 ‘아시아 부호유치 경쟁 2라운드’라고 불렀다. 기존 부호의 자금을 유치해 운용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1라운드에선 미국 시티가 가장 앞서 나가고 있다. 그렇다고 승부가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 아시아 지역에서 새로운 부호가 계속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인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올 6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부호의 재산은 2008년과 견줘 11.5% 늘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줄었던 부가 원상회복하면서 예년보다 증가율이 높았다(기저효과). 금융위기 피해를 가장 적게 본 아시아 부호의 재산은 22%나 불었다. 이런 흐름은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8년까지 중국과 인도의 부호 숫자가 3배(2009년 기준)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황금어장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글로벌 메이저 은행들은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블룸버그는 “부호 2세를 교육시켜 고객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는 아시아의 미래 부호를 선점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메이저 은행들은 아시아 부호들이 여전히 동경하는 서구의 첨단 금융 노하우와 경영 지식을 앞세워 2세를 유치해 특별한 유대관계를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탠다드차타드 쪽은 “아시아의 미래 비즈니스 리더가 나중에 주거래 은행을 선택할 때 청년 시절 익숙해진 곳을 고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미래의 수익 원천을 장악하기 위한 메이저 은행 간 쟁탈전이 이미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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