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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하지 않는 모호한 작가 뒤라스 장르 다르지만 그의 작품세계와 상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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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09면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 양혜규(39). 올해 미국 카네기뮤지엄과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작품이 설치되며 화제의 중심에 선 그녀의 개인전이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8월 21일부터 10월 24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작품세계를 아우르는 총 10여 점의 설치·사진·영상작품으로 구성된다. 또 작가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주요 인물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영화제(9월 13~19일·씨네코드선재)와 모노드라마(9월 11~12일·남산예술센터)까지 아울러 기획됐다.

아트선재센터에서 ‘셋을 위한 목소리’ 전시, 설치 미술가 양혜규

신작 광원(光源)조각군(群) ‘서울 근성’은 ‘약장수’ ‘얼굴 없는 미녀’ 등의 이름을 가진 6개의 의류 행어에 안마기·화장 스펀지·수세미 등 각각의 오브제를 매달고 곳곳에 배열, 각각 개성 있는 개인으로 의인화한 작품이다. 작가의 관심사인 개인과 타자, 공동체의 관계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제가 서울 토박이이기도 하고, 서울은 제게 특별한 도시이기 때문에 서울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까요? 제목에 ‘서울’을 꼭 넣고 싶었어요. 게다가 서울은 아주 인텐시브한 도시이기 때문에 ‘근력’이 필요하죠. 어느 도시든지 그 현장에 필요한 근력이 있는데, 서울에는 어떤 근력이 필요할까를 생각했어요. 근력을 키우다 보면 근성이 되겠죠.”

전시의 타이틀 ‘셋을 위한 목소리’에서 ‘셋’이란 작가와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리고 이방인을 가리킬 정도로 이번 전시에서 뒤라스가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 작가에게 뒤라스는 어떤 존재일까?

“동료의식, 공감대랄까요. 장르는 다르지만 그 사람과 느꼈던 공감대를 이용해 제 얘기를 하고 싶어요. 뒤라스는 잘 알 수 없고 모호한 작가인데 절대 타협하지 않고 설명에 대한 요구에 굴하지 않죠. 자신의 작품을 설명적이거나 지시적으로 풀지 않았거든요. 처음엔 이해할 수 없어서 오기가 났죠. 그런데 그녀의 유년 시절을 살펴보고 그녀의 정체성이 이국화된 것에 공감하게 됐어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태어난 식민지배자 입장이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원주민과 지배계급 사이에 이중의 소외감을 느껴야 했거든요.”

작가는 뒤라스와의 공감대-개인과 타자, 공동체의 불확실한 관계-를 감각 환경적 설치작품으로 펼쳐 보이는 일련의 작업을 계속해 왔다. 전시장 3층 전체를 차지한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셋을 위한 그림자 없는 목소리’(2008) 역시 그 일환이다. 색색의 조명이 교차되는 가운데 블라인드의 미로를 따라가다 보면 좌 히터, 우 선풍기 사이에서 독특한 온도감을 경험하게 된다. 또 커피향, 박하향, 풀향기 등에 노출되면서 아크릴 거울에 비친 왜곡된 자신의 모습과 블라인드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타인의 존재를 불안정하게 느끼게 된다.

작가에게 블라인드란 ‘반은 거르고 반은 내보내는’ 반투과성, ‘막히면서도 트인’ 부정형의 공간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물이다. 외부 요인에 의해 ‘다치기 쉬운(vulnerable)’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미로 끝에서 만나는 음향장치에 음성을 입력하면 조명이 변하도록 함으로써 작가가 만든 빛의 메커니즘을 관객이 깰 수 있도록 고안한 것도 자아와 타인 간의 ‘다치기 쉬운’ 관계를 공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끼어드는 ‘목소리’ 또한 전시 타이틀 ‘셋을 위한 목소리’에서 암시하듯 작가와 뒤라스의 공감대 일부다.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기 때문에 묘사하기 어려운, ‘형언할 수 없는 부분’을 감각화하는 것은 영화와 소설을 넘나들면서 침묵 혹은 음악적 언어세계를 장르 구분 없이 실현한 뒤라스에 대한 오마주이자 작가가 모노드라마와 영화제라는 방식을 통해 증폭시켜 보여주려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 무대에 올리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뒤라스의 작품 중 처음 읽었던 책인데, 내용을 이해 못해 공부를 시작했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에서 선택했습니다. 장르 차이를 인정하기 때문에 연극적 성취에 대한 야망은 없지만, 단지 각계각층 사람들이 뒤라스에 대해 얘기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뒤라스가 글쓰기와 무대, 영화의 관계성에 주목했던 만큼 연극, 영화의 형식을 빌려 그녀가 생각했던 포인트를 실천해 보는 워크숍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모노드라마에서는 뒤라스의 글쓰기 행위가 여배우의 낭독으로 전환되면서 문자로 된 언어가 음악적 언어로 변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게 되는데, 연기자가 아닌 아나운서 출신 유정아씨가 캐스팅됐다.

“유정아씨는 ‘낭독’이라는 방식에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극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보다 배우의 현존과 존재감을 중시하는 뒤라스의 연기 해석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가 방송인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면과 ‘무대 위의 그 여자’가 중첩되길 원하고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작가는 서울 전시 이후에도 많은 해외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해외에서 그녀에게 거는 기대는 어떤 것일까. 그런 기대가 작품 활동에 부담이 될 법도 하다.

“내년에만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미술관, 영국 옥스퍼드 미술관, 미국 아스펜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어요.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제 작품이 보통의 아시아, 제3세계 작가들과 달리 쉽지 않고, 시각적으로 제 작품임을 알아볼 수 있는 구석이 적다는 점. 정형성이 없다는 것이 과거에는 단점이었는데 이제 예측 불가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장점이 된 것 같아요. MoMA 등에 제 작품이 설치되는 것은 그저 경사일 뿐 전혀 부담스럽지 않아요. 눈앞에 처리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더미 같기 때문에 솔직히 5분 좋아하고 넘어갑니다. 베니스 이후에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 작가’라는 확실한 수식어가 생겼다는 점 정도예요.”

관람객들은 그녀가 쳐놓은 블라인드의 미로를 헤매게 될 것이다. 모두가 하나의 공간-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완전한 시점과 다치기 쉬운 관계로 인해 결국 개인은 개별적인 단위체이며 자신의 주체적인 감각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양혜규의 미로 역시 주체성이 이끄는 대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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