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프런트] 이중섭 소 그림의 진위, 어머니쪽 여자 후손이 열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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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최근 서울중앙지법 형사5부(부장 김정호)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보낸 ‘털 감정 보고서’가 도착했다. “증거물 그림 ‘이-0996’(사진)의 쇠등 부위에서 채취한 털은 붓털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DNA 분석·감정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2005년 미술계를 뒤흔들었던 ‘이중섭·박수근 대규모 위작 사건’ 항소심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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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재판부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위탁 보관 중인 위작 의혹 그림에서 털 한 가닥을 채취해 국과수에 분석을 의뢰했다. “압수된 그림 2800여 점 중 흰 소 그림에 ‘이중섭의 머리카락’이 물감에 묻은 채 남아있는데, 이를 채취해 이 화백의 차남 태성씨의 DNA와 비교하면 진품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피고인 김용수(71)씨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김씨는 지난해 2월 1심에서 가짜 그림을 판매한 혐의(사기 등)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본지 7월 22일자 20면>

국과수에서 머리카락이란 감정 결과가 나왔지만 이 머리카락이 이 화백의 것인지 입증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피고인 김씨의 주장대로 이 화백의 차남 태성씨와 이 머리카락의 DNA를 비교하는 게 불가능하다.

국과수 보고서는 “부자 관계를 밝힐 수 있는 핵 DNA가 소실돼 분석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 오라기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보고서가 “모계 혈통을 밝힐 수 있는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은 분석 가능한 상태”라며 “이종(姨從) 혈족을 통해 DNA 비교가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털 감정’을 담당했던 국과수의 전문가는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서열은 같은 어머니의 혈통이 공유하는 것으로 여성을 통해서만 다음 세대로 유전된다”고 설명했다.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은 모두 이를 공유하지만, 다음 세대로 이 유전자를 전할 수 있는 것은 딸의 자식들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성(姓)이 남성의 자녀들에게만 대대로 전해지는 것처럼 미토콘드리아 DNA는 여성의 자녀들에게만 유전되는 것이다. 이 전문가는 “이론상 몇 세대가 지나더라도 DNA 분석을 통해 동일한 모계 혈통이라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화백의 ‘모계 혈통’<그래픽 참조>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화백의 형과 누나는 이미 작고했다.

『이중섭 평전』을 쓴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는 “이 화백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이라며 “일찍 출가한 누님의 자녀는 살아있더라도 북한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화백에겐 이모가 한 명 있었지만 이 화백의 이종사촌들은 모두 작고했을 연배다. 1916년 태어난 이 화백의 나이가 살아있다면 94세니까 동시대를 살았던 이종사촌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작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화백의 이모는 모두 열두 남매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여자 이종사촌’이 낳은 자녀가 있다면 DNA 분석이 가능하다. 재판부는 “해당 친척을 찾게 되면 신원을 확인한 뒤 법정에서 국과수 감정인이 직접 DNA를 채취해 분석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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