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32. 서편제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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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서편제'에 출연한 김규철(右)과 오정해는 1995년 제31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남녀 신인상을 받았다.

1993년 4월 10일 개봉한 '서편제'는 서울에서만 113만명이 관람해 역대 흥행기록을 깼다. 아마 지금처럼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가 전국에 깔려있었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관객이 들었을 것이다. 단성사 한 곳에서만 여섯 달이 넘는 196일간 상영해 이런 기록을 세웠으니 대단하긴 대단했다. 비바람에 극장의 영화 간판이 바래져 두 번이나 새로 그렸을 정도였다. 극장 앞 커피숍에 앉아 있으면 암표상들이 "사장님, 고맙습니다"라며 커피값을 대신 내주고 가기도 했다. 한번은 극장에만 가면 마주치는 얼굴이 있어 물어봤더니 '서편제'를 19번 봤다는 것이었다. 매표소 직원에게 "앞으로 이 사람한테선 표값을 받지 말라"고 했다. '이런 열혈 관객이 한국영화를 살리는구나' 싶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서편제'는 정말 원가(原價)가 싼 영화였다. 제작비가 통틀어 6억원이었다. 100억원짜리 영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제작되는 요즘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다. 겨우 10년 새 한국영화의 덩치가 얼마나 커졌는지 알 수 있다. 어찌 된 일인지 요즘 영화계에는 '크게 질러야 크게 먹는다'는 대작(大作)주의가 횡행한다. 하지만 나는 영 마땅치 않다. '서편제'는 35억원을 남겼다. 500%가 넘는 수익률이다. 근래 영화들 중 수익률 100%를 넘는 영화가 몇 편이나 있는가.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한국영화가 지나치게 스타에 기대고 제작비를 물 쓰듯 하는 걸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좀 더 소박해지고, 과감한 시도를 할 필요가 있는데 다들 눈치만 보는 것 같다.

'서편제'는 신인급 연기자를 주연으로 기용했다. 오정해.김규철은 카메라 앞에 서본 적이 없었다. 김명곤은 '개벽' 등에 출연한 경력도 있지만 지명도가 높지 않았다. 영화의 물줄기를 바꾸는 작품은 바로 이런 데서 나온다. 식상한 얼굴들, 진부한 스토리로는 고만고만한 영화 밖에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과감한 신인 기용과 판소리라는 색다른 요소를 도입한 '서편제'는 당시엔 모험이었다. 감히 '오버'해서 말하자면 후배 영화인들이 '서편제'를 벤치마킹했으면 좋겠다. 소화불량 상태에 빠진 듯한 한국영화가 활로를 찾으려면 '서편제' 같은 방식 밖에 없다고 믿는다.

'서편제'는 특히 음악을 맡은 김수철의 공이 적지 않았다. 판소리 영화를 한다고 하자 선뜻 "제가 판소리도 8년간 공부했습니다"라면서 의욕을 보이는 것이었다. 임권택 감독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대뜸 "가수가 뭘 해?"라면서 시큰둥해 했다. '두 여자의 집' '개그맨' '경마장 가는 길' 등에서 음악을 맡아 우리와 인연이 깊은데도 임 감독은 그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자주 만날 수 있도록 김수철에게 미리 전화해 임 감독이 나오는 자리에 참석하게 했다. 그의 음악이 담긴 테이프를 임 감독에게 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임 감독의 반응이 없자 김수철은 몸이 달았다. 어느 날 벽제 촬영장으로 일본 기자들이 취재를 왔다. 임 감독과 인터뷰를 하면서 "음악은 누가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임 감독은 "김수철이라고, 젊은 친구가 국악에 조예가 깊고 음악도 아주 좋아요"라고 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김수철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촬영 내내 나를 포함한 스태프들 사이에는 판소리 공부 바람이 불었다. 쉬는 시간마다 구성진 소리를 뽑아내느라 애썼다. 판소리를 터득하는 데 실패했지만 영화 속에 푹 빠져 한 몸이 된 듯한 특별한 경험을 한 건 '서편제'가 처음이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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