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경술국치100년 기획] 망국의 뿌리를 찾아② 망국으로 이끈 3대 조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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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일간 일본의 3개 협약

#1. 태프트 - 가쓰라 밀약 1905년 7월 29일
#2. 제2차 영·일동맹 8월 12일
#3. 러·일 포츠머스 강화조약 9월 5일


1905년 여름은 치욕적이다. 조선의 운명은 암울해졌다. 러일전쟁의 승자는 일본이었다. 그 무렵 진행된 3개 협상이 조선을 압박했다. 태프트-가쓰라 미·일 밀약(1905년 7월 29일)→제2차 영·일 동맹(8월 12일)→ 러·일 포츠머스 강화조약(9월 5일)-. 일본이 러시아·영국·미국과 맺은 협약이다. 강대국들은 조선을 형편없이 업신여겼다. 일본은 조선의 종주권(Suzerainty)을 확보했다. 한반도의 외교적 포위망을 완비했다. 그것은 그해 11월 17일 을사늑약(勒約, 강제 보호조약)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외교권을 빼앗겼다. 경술국치(1910년)는 그 굴욕의 연장이다. 망국은 5년 전 여름에 결판났다. 39일간 3개의 협상-. 조선을 견디기 어렵게 만든 열강의 외교 게임. 그 흥정과 거래 현장들은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곳을 다년간 추적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낀 대한제국의 운명을 풍자한 삽화.1905년 미국 시사 잡지 ‘하퍼스 위클리’ 에 실렸다.

글·사진=박보균 기자(편집인)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R)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친일파다. 그러나 1905년 5월 일본 해군의 압승은 전율과 같은 충격이었다. “식민지 필리핀을 일본이 공략에 나선다면….” 태평양함대는 일본 연합함대를 제어하기 힘들었다. 그는 2중의 대비에 나섰다. 러·일 양측에 종전을 설득했다. 그리고 핵심 참모를 일본에 파견했다.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 그는 TR의 지시로 7월 일본과 필리핀으로 떠났다. ‘제국의 항해’(Imperial Cruise)로 불렸다. 일본은 대환영했다. 태프트 일행은 도쿄의 영빈관 시바리큐(芝離宮)에 묵었다. 그때 찍은 사진들은 친선의 화기애애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밀약과 술수의 그림자로 가득했다. 7월 29일 아침 시바리큐. 태프트는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를 만났다. 가쓰라는 조슈(長州)군벌의 간판이다. 조슈는 한국 침략의 원흉들을 배출했다.

가쓰라는 미국의 걱정을 먼저 덜어주었다.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침략 의도를 품지 않으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한다.”(각서1항) 마지막에 조선 문제(3항)를 논의했다. 가쓰라의 말은 위압적이었다.

▶가쓰라=“조선은 러시아와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다. 그대로 두면 조선은 다른 강대국과 어떤 합의, 조약을 체결하는 습관으로 되돌아간다. 결정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태프트=“조선이 일본 동의 없이 조약을 체결하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일본 병력에 의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수립하는 게 전쟁의 논리적 결과다.”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은 휴지조각이 됐다. 그 조약은 선린, 중재의 거중조정(good office) 내용을 담고 있다. 밀약의 장소는 없어졌다. 시바리큐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탔다. 지금은 공원이다. 나는 그것으로 역사의 갈증을 끝낼 수 없다. 태프트를 찾아나섰다. 태프트는 TR 다음 대통령이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그곳 태프트의 집은 박물관 겸 역사유적지다. 필리핀 총독→육군장관→대통령→대법원장을 지낸 그의 화려한 경력을 얹은 유품과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조선과 필리핀을 맞교환한 밀약은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태프트-가쓰라 비망록에서 미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제감리(control)를 인정했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공세적인 계획(aggressive design)을 부인했다.”

착잡했다. 사진과 설명문이 고작이었다. 무성의하다는 느낌이었다. 역사의 비애가 더욱 깊어진다. 그 시대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 협약은 불신의 상징이다. 우리 사회 반미 정서의 근원이다. 함께 갔던 조지타운대 객원연구원(마이클 자오)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중국인 2세다. “청나라는 국제적 배신을 무수히 당했다. 배신을 기억해 역사의 경계로 삼는다. 하지만 배신 문제에 몰입하지 않는다. 역사 패배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습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협약은 비밀에 부쳤다. 그 문건은 19년 뒤(1924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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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영·일동맹=1905년 1,3월 일본군은 만주의 뤄순(旅順) 과 봉천(현재 瀋陽)에서 점령한다. 세계 최강 러시아 육군은 패퇴했다. 영국은 러일 전쟁의 흐름에 민감했다.“러시아는 이제 극동에서 봉쇄된다. 러시아 남진의 다음 출구는 인도 쪽이 유력하다.” 당시 영국 외무성의 판단이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다.일본은 영국의 동맹국이다.

3월말 영국의 헨리 랜스다운(Lansdowne) 외상은 런던 주재 일본 공사 하야시 다다스(林董)와 만났다.두 사람은 영일동맹 (Anglo-Japan Alliance,1902년1월)조약의 주역이었다. 랜스다운은 동맹의 개정 필요성을 언급했다. 동맹의 범위를 인도까지 넓히자는 의사를 표시했다.일본도 러시아의 복수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때 영일동맹의 진가는 발휘되고 있었다.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해군과 외교망은 발틱 함대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그 정보를 일본에 전달했다. 발틱함대는 5월27일 스시마 해협에 들어섰다. 8개월 동안 지구의 반을 돌아 피곤에 찌들었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제독의 연합함대는 숨죽이며 기다렸다. 발틱 함대를 단숨에 몰락시켰다.

일본 요코스카(橫須賀)항 미카사(三笠)공원에 가면 러일 전쟁의 기억이 있다. 미카사는 도고의 연합함대 기함이다. 그 배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도고의 붓 글씨도 전시돼 있다. “황국의 흥패가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원 분투하고 노력하라”(皇國興廢 在此一戰 各員 一層奮勵努力) 쓰시마 해전때 훈시다.

영국은 이미 영광스런 고립 정책을 포기했다. 신흥 독일과 러시아 견제를 위해서다. 그게 1차 영일동맹의 배경이다. 랜스다운과 하야시는 개정 협상을 계속했다. 랜스다운 하우스(지금 프라이빗 클럽)에서 머리를 맞댔다. 영국은 조선을 자립능력이 없는 나라로 파악했다. 강대국들의 생각은 같았다. 동맹 전문은 “청과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indepedence and territorial integrity)을 유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6월말 개정 협상 초기에 ‘대한제국’은 삭제됐다.영국은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 한 달 전이다.

두 사람은 협상수정안을 여러 차례 교환했다. 동맹 내용을 격상시켰다. 방어동맹에서 공수(攻守,defensive & offensive)동맹으로 바꿨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도(Guidance)ㆍ감리(監理,Control)ㆍ보호(Protection)조치를 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다.” (조약 3조)는 내용을 넣었다. 지도ㆍ감리ㆍ보호는 약속국에겐 저주와 악몽의 언어였다.

포츠머스(Portsmouth)는 미국 동북부 뉴햄프셔의 군항이다. 그곳에 거대한 해군기지가 있다. 보스턴에서 50마일 떨어져 있다. 내부의 군 공창(工廠·naval shipyard) 건물에서 러시아·일본의 협상이 벌어졌다. 그 건물이 존재한다. ‘빌딩 86’-.

붉은 벽돌의 평범한 3층 직사각형이다. 사적지의 맛은 나지 않는다. 거기서 역사의 대서사시가 써졌다. 빌딩 앞쪽 벽에 대형 동판(2.4X1.6m)이 붙어 있다.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빌딩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초청에 의해 러시아와 일본 외교사절 간 평화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1905년 9월 5일 오후 3시47분 두 제국 사이의 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 조약(Treaty)이 체결됐다.” 가장자리에 일본 왕실과 러시아 차르(황제)의 문양을 번갈아 새겼다. 동판은 역사의 블랙박스다. 포츠머스조약은 조선엔 결정타였다.

포츠머스 평화빌딩에 붙어 있는 조약 기념 동판.

1905년 여름 러일전쟁(개전 1904년 2월)의 당사국들은 한계에 직면했다. 일본은 인적·물적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공산주의 봉기는 러시아의 전쟁 의지를 더욱 떨어뜨렸다.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TR·26대)는 종전 협상을 중재했다. 그는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DR)의 먼 친척이다. 그는 일본을 러시아의 방패막이로 후원했다. 사석에서 “일본이 우리를 위한 전쟁을 하고 있다. 일본 승리가 기쁘다”고 할 정도였다.

전세가 일본으로 기울었다. TR의 태도는 달라졌다. 동북아의 세력균형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는 회담 장소를 물색했다. 워싱턴의 더위를 피해 휴양지 포츠머스로 잡았다. 1905년 8월 8일 러시아·일본 대표단이 도착했다. 러시아의 전권대표는 세르게이 비테(Sergei Vitte·56) 전 재상, 일본은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이 대표를 맡았다. 포츠머스 역사연구회의 피테 맥렌은 “외교무대의 스타가 총출동한 세기의 협상이었다. 비테는 러시아의 만주 진출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미국 제국주의 시대를 개막한 TR(47), 고무라(50)는 일본 제국 외교의 전략 틀을 짰다”고 말했다.

건물 2층은 전시실이다. 협상테이블이 진열됐다. 모조품이다. 고무라가 앉았던 가죽 의자도 있다. 『언덕 위의 구름』의 작가 시바 료타로 를 상념에 젖게 한 의자다. 8월 10일 첫 회의가 있었다. 고무라는 12개 항의 강화 조건을 내걸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 러시아군의 만주 철수, 뤼순·다롄항의 일본 조차, 러시아 배상금 지불 등이었다. 10년 전 3국간섭의 수모를 씻으려는 의도가 확연했다.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간섭의 주역은 비테였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의 대가인 랴오둥(遼東)반도를 반환했다.

회담을 중재한 루스벨트 대통령(가운데)과 일 대표 고무라(오른쪽 둘째), 러 대표 비테(왼쪽).

러시아 측은 대체로 수긍했다. 그러나 배상금 지불과 사할린섬 할양은 거부했다. 국가 존립과 차르(니콜라이 2세)의 위엄을 해친다는 이유였다. 비테는 “일본이 돈 때문에 전쟁을 계속한다”고 주장했다. 세계 언론은 러시아 쪽으로 기울었다. 협상은 배상금 없이 사할린을 나누는 것으로 결말지었다. 러시아는 외교전에선 이겼다.

그러나 일본은 숙원을 이뤘다. 만주 진출의 발판을 확보했다. 조선 병합에 장애물 없이 나설 수 있었다. 메이지(明治)유신의 진정한 성취로 자부했다. 조약 2조는 이렇게 보장했다.

“러시아 정부는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 군사경제상 우월한 권익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고, 일본 정부가 조선에서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지도·보호·감리 조치를 취하는 데 방해하거나 간섭에 나서지 않는다.” 지도·보호·감리의 굴욕적 용어가 예외 없이 들어 있다.

전시실의 컨셉트는 평화다. 빌딩의 애칭도 ‘평화빌딩’이다. 신문 제목도 ‘평화’다. 시어도어는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중재의 공로다. 그러나 그 평화는 대한제국엔 잔혹했다. 조선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다. 을사늑약은 두 달 뒤다. 맥렌 연구원과 나의 시각은 비슷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정글의 법칙이 난무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민족은 평화를 맛볼 자격이 없었다. 그 평화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구걸하는 평화는 위선의 독소로 썩는다. 경제력·군사력이 없으면 평화는 얻을 수 없다.”

망국의 뿌리를 찾아 ① 메이지 일본의 ‘한국병탄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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