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받지 못할 국민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꽃다운 나이의 두 여중생이 너무나 어이없고 끔찍하게 스러져 갔다. 문제의 무한궤도차량 운행을 담당했던 두 미군병사가 무죄방면되면서 시작한 범국민적 시위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 측의 무책임한 처리와 미온적인 사과,그리고 한국 정부의 방관적 태도로 인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대다수 시민이 애절하고 미안하며 분개스런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자긍심과 주권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추모와 항의에는 이처럼 순수하고 엄숙한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적인 군중시위가 되고, 또 그 시위가 미 대사관으로 향하면서 정치행사와 반미운동으로 변질되고 여러 부작용을 가져온다.

반미 정서가 확산되면서 젊은층 상당수가 미군 철군 요구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또 미군과 미국인에 대한 적대행위가 자주 보도된다. '살인 미군'이라는 팻말이 시위에 단골로 등장한다. 미군부대 영내 침입 또는 화염병 공격이 자행되고 미군에게 노상 집단폭행과 시민의 야유가 공공연히 행해지기도 한다. 국내의 서양인들 모두가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 시위 중 조지 W 부시 대통령 모습의 가면을 쓴 사람을 무릎 꿇리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연극이 연출되는가 하면, 상소리로 미국을 욕하는 노래가 합창된다. 세계가 놀라고 있다. 세계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계는 우리 젊은이들의 슬픔과 분개를 심정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냉철하다. 그들의 눈에 사태의 발단은 분명 미국 측이 당초의 상황을 소홀히 처리한데 있지만 그래도 원래의 사고는 작전상의 잘못에 따른 사고였지, 고의적인 살인이 아닌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사고라 해도 우리는 이를 문제삼고 미국에 책임과 대책을 물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사고를 살인으로 몰아치고 나아가 주한미군 모두를 살인자처럼 취급해 그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모욕을 주기도 하고 또 그들의 대통령과 나라를 모독하는 것은 억지스럽고 난폭하며 야비하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의 주장과 반미적 행위가 합리적이고 명예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존과 주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존중심을 얻기보다 오히려 잃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세계는 한국이 지난 50여년간 미국과 각별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엄청난 혜택을 누려왔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6·25전쟁 당시 5만4천명의 미군들을 희생시키며 우리나라를 지켜주었고, 그후 지금까지 경제발전이 가능하도록 수만명의 미군을 주둔시켜 안보울타리를 쳐주고 또 자본과 기술과 시장을 제공해 주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경제적 번영과 이에 따른 민주주의의 만개(滿開)는 미국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이제 와서 미국을 매도하고 미군을 살인자로 몬다면 그들은 우리를 "존중받지 못할 국민"으로 볼 것이다. 실제 미국인들이 낙담하고 분개하며 당장 철군하자는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곧 한국 측의 특별한 노력이 없는 한 미군 철군이 단기간 내 이뤄질 수 있다.

철군은 언젠가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 보장 없는 무리한 철군, 한·미 불화로 인한 불명예 철군은 안보불안과 다각적 한·미 제휴의 해체를 동시에 가져온다는 것이 문제다. 이런 식으로는 안된다. 국제기업들은 한반도 평화가 요원하다고 본다. 무리한 철군은 안보불안을 야기하고 따라서 대한(對韓)투자가 퇴조한다. 안보불안 아니라도 신변불안을 느끼는 나라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

경제적 제휴가 해체되면 미국의 시장, 자본 및 기술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진다. 역시 한국경제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투자가 시들게 된다. 고령화는 급속히 진행된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고속 경제성장의 혜택을 못볼 것이다. 그럴수록 중국에의 의존은 계속 커진다. 결국 한국은 중국의 강력한 영향권 내로 흡인되지 않을 수 없다. 자존과 주권은 어찌 될 것인가.

한·미협약상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한국 정부의 잘못이다. 노무현(盧武鉉)대통령당선자가 이 잘못을 고치겠다고 했다. 시위를 거둘 때가 됐다. 새정부를 도와 전문가들이 나서서 미국 측과 냉철한 분석과 토론으로 해법을 찾도록 해야 한다. 민간단체들 간의 대화로 한·미우호의 재구축과 제휴의 보전을 추진해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