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다구니 인생들의 눈물… 웃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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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 작가 이명랑(29)씨의 연작소설 『삼오식당』은 영등포시장을 배경으로 한 상인들의 이야기다. 삼오식당 둘째 딸인 화자(話者)의 눈을 통해 펼쳐지는 영등포시장 풍경은 소위 '서민(庶民)'의 삶이란 무엇인지 생생히 알려준다.

정치인들이 쓰는 단골 어휘이자, 이데올로기에 붙잡힌 '민중'보다 더 쉽게 마음을 때리는 '서민'. 이 소설은 '사회적 특권이나 경제적 부를 누리지 못하는 일반 사람'(서민)이 어떨 때 분개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겁없이 보여주고 있다.

우선 등장인물의 면면을 한번 살펴보자. 중풍으로 십 년 가까이 자리보전하고 있던 남편을 두고 악착같이 밥장사를 하여 세 딸을 키워낸 삼오식당 여주인, 과일가게 점원에게 '농락'당한 0번 아줌마, 일수꾼 특유의 고집을 자랑하는 로터리 할머니, 술집 여자의 마지막 순애보를 처절하게 대변하는 노랑머리, 동네의 '걸어다니는 생중계 소문 전파 라디오' 고물장수 박씨 할머니….

이들은 무엇에 전전긍긍해 하는가. 시장통이라는 데는 아무래도 생계와 양육으로 대표되는 먹고 사는 고민이 가득하고, 남성적인 일상의 폭력이 횡행하고, 육욕에 가득찬 중년 여인들의 소문이 무성한 곳이다.

시장은 결국 입에 관련된 모든 것이다. 주변의 소문, 먹는 문제, 바람내는 뽀뽀 등등. 시장의 문제(=사는 문제)는 결국 입으로 수렴되고 입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닥치면 다 하게 되고, 언제·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는 사실을 삶의 철학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란 어떤 결정적 각성의 계기에 의해 확 바뀌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에게 생은 드라마가 될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정은 각별하다. 0번 아줌마의 순애보와 그 순애보에 따라붙는 주변의 멸시, 그리고 가족에 의한 내쫓김에도 우리는 0번 아줌마를 미워할 수 없다.

"어쩌면, 0번 아줌마도 어느 날 이렇게, 느닷없이 황씨 앞에서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곳에서 살면서 눈물 흘려야 되는 날이야 얼마나 수두룩한가! 거북이처럼 생활을 등에 지고 있는 여자가 그 고달픔을 토로하고, 사내는 여자의 생활에 불어터진 투박한 손을 어루만져주었는지도…(중략) 그저 아주 잠깐이었을 게다. 사랑도, 배반도, 불륜도 아니고, 슬픈 사람들끼리 서로의 쓰린 곳을 그저 한번 핥아주었을 뿐인 거라고. 살려달라고,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그렇듯 역사에 등재되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역사에 오르지 못할 사람들의 악다구니판 같은 삶의 현장을 그려내는데 요즘 우리 소설이 얼마나 등한시했던가를 떠올리면 『삼오식당』의 장점은 뚜렷이 부각된다. 요즘 우리 소설, 특히 여성 소설들 대개가 자기 입의 문제(그것을 여성의 욕망이라 평하건, 후일담이라 칭하건)에서 몇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모든 것을 알고있다는 투의 지식인적 권태는 생의 현장에서 얼굴 한 번 못 내밀고 결정적 순간에 도망치는 '가짜'일 확률이 높다.

'사는 게 다 그런 거, 거기서 거기'라는 소설적 진실과 이해의 메시지는 삶의 세목이 확보될 때만 가능한 것 아닐까. 물론 등장인물의 다양함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소설 전개의 산만함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는 앞으로 극복 가능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1997년 문학무크지 '새로운'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실제로 영등포 시장에서 성장했으며 이화여대 대학원을 다니며 그곳에서 과일장사를 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담을 잡지 '샘터'에 연재한 후 산문집 『행복한 과일가게』(2001)를 낸 바 있다.

우상균 기자

hothea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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