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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8>제104화두더지人生...발굴40년:43.거창 고려시대 벽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암사동 선사유적 발굴이 한창 진행되던 1971년 11월 19일 오후 김원룡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와 김정기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장은 함께 경남 거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날 아침 거창에서 고려시대 벽화무덤(壁畵古墳)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도하 각 신문에 실리자 문화재관리국이 문화재위원인 김교수와 김실장을 급히 현장으로 파견한 것이다.

두사람은 오후 늦게 거창읍에 도착했다. 벽화무덤의 존재를 언론에 제보한 당사자는 최남식(崔南植)·김태순(金泰淳)씨 등 거창군 주민이었다. 최씨 등은 우연히 도굴된 무덤 내부 벽면에서 그림(壁畵)을 발견했다.

남부지방의 고려시대 무덤에서 벽화(壁畵)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이 떠들썩할 법한 일이었고 중요한 유물도 나올 것으로 기대됐다. 이튿날 김교수와 김실장은 군 공보실 직원의 안내로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 현장으로 안내됐다. 재왕(宰王)골 또는 석장(石葬)골이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무덤은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무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무덤 내부에는 잘 다듬은 판돌(板石)로 짜서 마련한 같은 크기의 무덤방(石室)이 각각 동·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서쪽 방에는 무덤 주인공의 유골(遺骨)편과 썩은 관 파편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동쪽 방은 널길문 돌이 젖혀진 채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고려청자 정도는 나오리라 기대했지만 도굴 피해를 봐 부장유물(副葬遺物)은 파편 한점 남아 있지 않았다.

벽화는 동쪽 방에 그려져 있었다. 천장을 제외한 사방 네벽에 흰색 회칠을 하고 색깔그림(彩色畵)을 그렸으나 도굴로 군데군데 회칠한 벽면이 떨어져나갔고 남쪽 벽 회칠은 완전히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남아 있는 벽화는 피리 부는 선녀(仙女) 등 그때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우수한 것들이었다.

무덤에 대한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이듬해 하기로 했다. 또 벽화의 추가 손상을 막고 유골편 등을 보존하기 위해 도굴 구덩이(盜掘坑)를 서둘러 막고 봉토의 전면을 비닐로 덮어 임시로 방수조치를 했다. 그리고 거창군청과 거창경찰서에 본조사를 실시하기 전까지 경비를 철저히 하도록 부탁하고 철수했다.

문화재관리국은 도굴로 파괴된 무덤을 원상태로 복원하고 또 사적(史蹟)으로 지정·보호하기 위해 가지정(暇指定)을 서둘렀다. 해가 바뀌었지만 조사 착수는 쉽지 않았다. 보수비용과 발굴 경비 재원이 마련되지 않아 72년 12월에야 본격적인 수습·발굴 조사가 이뤄지게 됐다.

나는 12월 9일 벽화 무덤 주변의 복원 정비 공사를 지시하고 발굴조사를 위한 사전 준비를 위해 문화재연구실 이호관(李浩官) 학예연구관과 함께 현장에 먼저 도착했다. 일종의 선발대였다. 초겨울이어서 기온이 급강하할 것에 대비해 무덤 전체에 대형 텐트를 둘러 치도록 했다. 텐트 안에서 작업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곧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봉토(封土) 제거 작업을 하던 중 무덤 남쪽에서 지름 1m 크기의 도굴용으로 보이는 구덩이를 발견했다. 아니나 다를까 구덩이 안에서 손전등에 사용하는 조그마한 전구(電球) 파편을 발견했다.

도굴범이 이곳을 통해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다 커다란 천장돌(天障石)에 막혀 포기했고, 마침 손전등 전구가 나가 급히 바꿔 버린 것으로 짐작됐다. 도굴된 무덤에서는 때때로 마시고 버린 소주병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느 회사에서 언제 생산한 술병인지를 확인해 도굴된 시기를 추정하기도 한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겨울철이어서 해가 짧다 보니 정해진 기간 내에 발굴을 끝내려면 야간작업을 강행해야 했다. 더구나 적외선 촬영 전문가를 동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벽화를 촬영하기로 날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더욱 작업을 서둘러야 했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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