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정운경 화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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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왈순아지매'와의 이별은 싫다. 4반세기의 음양(陰陽)이 굽이마다 녹아 있는 '아지매의 초상'은 우리내 얼굴이다. 아지매는 오래 전부터 타인이 아니다. 한 울타리 한 이불 속 식구다. 그의 '냄새'와 '체온'은 이미 우리 영혼에 내장된 지 오래다. 미운 정 고운 정, 그렇게도 잔뜩 묻혀놓고 훌쩍 떠난단다. 몰인정한 아낙네 같으니라구….

혹여 아지매 심신에 탈이 생겼으면 어쩌노? 어느 유명 정치인의 말마따나 황혼을 벌겋게 물들이는 화려한 일몰을 작심했을까? 필시 그렇지는 않을 터.

아지매는 잠시 고단을 털고자 의미 있는 마음의 산책길을 챙기고 있을 것이야. 보다 광활한 여백(餘白)을 품기 위해 더 가파른 꼭대기를 탐하는 '가슴'을 다듬기 위해 한동안 붓을 놓는 거야. 틀림없어. 국내 신문사상 초유의 최장수를 기록한 사내가 아니던가.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있다. 그러나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질긴 '목숨'이었다. 그에겐 분명히 휴식이 보약일 거야.

정운경 화백과의 첫 만남은 1960년대 후반 필자가 경향신문 정치부 데스크를 맡고 있을 때로 기억한다. 장안의 인기를 독점했던 왈순아지매가 대한일보에서 경향신문으로 이사온 것이다. 십중팔구 붙들려 왔을 게다. 모두들 탐을 냈으니까.

바로 내 책상 옆구리에 걸터앉은 아지매의 '안방'은 늘 차분했다. 鄭화백의 첫인상은 수수하고 몸가짐도 얌전했다. 꽃사슴 같은 가늘고도 온순한 눈매가 어쩜 온 세상사를 꿰차다시피 야무지게 끌어 안는지 새삼 놀랐다. 더러 아이디어랍시고 주제넘은 '훈수'를 보탠 적도 서너번 쯤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왈순아지매의 세계는 만화가 특유의 비딱한 경도(傾倒)의 발상에 의지하는 평범한 단면도가 아니다. 차라리 물구나무서기로 정면을 투시하는 독보적인 안목을 장치하고 있다. 그러기에 아지매의 본성과 색깔은 정직성을 바탕으로 한다. 아지매는 한 마디로 이 시대의 증인이다. 그의 퇴장은 우리 모두의 상실이다. 전혀 딴 얘기지만, 이번 12·19 대선은 2030 세대가 몰고 온 돌개바람이라고 야단들이다. 이 바람과 더불어 왈순아지매도 사라지는 것인가! 필자의 과민 탓일 게다.

아지매는 '부활'의 날개짓으로 언젠가 우리 곁으로 다가 올 것이다. 아지매 파이팅.

정재호

월간『헌정』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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