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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직장·캠퍼스 개성시대:톡톡 튀는 개성… 대학·직장을 바꾼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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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난 23일 오후 2시 국민은행 압구정서(西)지점. 몸에 착 달라붙는 양복에 귀걸이를 한 류재상(30)계장이 손님을 맞고 있다. 머리는 노랗게 물들였고, 안경도 파란 색깔이 진하다. "내 자신의 개성 표현이기도 하지만 고객들도 편안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날 연세대 상경대학 지하 1층. 창업동아리인 '연세벤처'에 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이념과 사상으로 무장한 동아리 대신 실속형 동아리가 인기다. 2030이 제 목소리를 내면서 직장과 캠퍼스의 분위기와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획일주의·엄숙주의가 사라지고, 즐거움을 추구하며 개성을 발산하는 자유로움과 다양함이 흐르고 있다. 이번 대선도 그들에게는 치열한 이념·지역대결의 장(場)이 아니었다. 월드컵 거리축제와 촛불시위에 이은 하나의 축제 이벤트였다.

그 들은 특정 후보에 대한 격렬한 지지나 반대 시위 대신 서울대·연세대·대구대 캠퍼스에 부재자 투표소를 설치하고 '참여'의 한마당을 만들었다. 새 정치를 열망하며 돼지저금통을 흔들었고, 거리 유세 때마다 변화와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 풍선과 노란 목도리의 물결을 만들었다.

결국 2030이 주축인 이번 부재자 투표에선 81만여명이 참여, 노무현 당선자가 50여만표(62%)를 얻은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이회창 후보보다 26만여표 앞선 것으로 최종 득표 차이의 절반(46%)에 이른다. 젊은 그들은 선거 이벤트 한마당에서 한껏 그들의 에너지를 발산한 것이다.

◇변하는 직장=직장의 유교적·군대적인 전통 조직문화가 신 개성주의로 변하고 있다.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에 상명하달식 수직적 문화가 사라지는 대신 다양한 풀뿌리 의견이 당당하게 표출되는 수평적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20일 밤 자동차 포털사이트 C사의 디자인팀 송년회. 파격적인 사자머리로 치장한 여직원 조미나(25)씨는 '마이크는 오케이(OK), 술잔은 노(NO)'를 외치며 맘껏 즐긴다. 그는 "튄다는 지적도 일부 있지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거리낌은 없다"고 말했다.

호칭도 달라졌다. 23일 제일제당 인사부 사무실. 20대 직원인 백종웅씨가 40대 최양기 상무에게 결재를 받으면서 "최양기님"이라고 불렀다. 崔상무는 웃는 얼굴로 서류를 꼼꼼히 들여다본 뒤 사인을 해주었다.

이처럼 제일제당·삼성전자 국내판매사업본부 등 대기업도 임직원들이 서로를 호칭할 때 '상무님'이나 '부장님' 대신 이름 뒤에 '님'을 붙이기 시작했다. 한국오라클은 아예 직급에 대한 호칭을 없애버렸다.

직장에 대한 개념도 단지 전문가로서 실력을 인정받는 곳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은 짬만 나면 자기 계발로 전문가로서의 경쟁력을 갖춘다. 실력만 있으면 언제든지 더 좋은 회사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23일 서울 신촌의 K금융학원. 미국 재무분석사와 미국 공인회계사 준비생을 위한 강의실에서 40여명이 강의를 듣고 있다. 대부분 재무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직장인들이다.

이 학원의 이주연(28)씨는 "수강생 4백여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2030직장인"이라며 "이직이나 승진을 위해 전문강좌를 들으려는 문의전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미국 재무분석사 응시자는 1998년 2백여명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5천3백여명으로 급증했다. 얼마 전 공인중개사 시험에 응시한 26만5천9백여명 중 30대가 38%로 가장 많았다.

그런가 하면 직장을 다니면서 부업을 하는 '투 잡(Two Jobs)족'을 꿈꾸는 2030도 많다. 취업정보 포털사이트 잡코리아와 페이오픈에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0%가 '기회가 되면 부업을 갖겠다'고 했다.

문화개혁 시민연대 이동연 사무차장은 "자유롭고 다양하지만 자칫 방향성을 잃을 수 있는 2030의 개성과 에너지를 4050의 경험에 접목해 21세기의 국가 경쟁력의 바탕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달라진 캠퍼스=지난 11월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비운동권 후보인 박경렬(24)씨가 승리했다. 한양대에서도 비운동권 후보가 2년 연속 학생회장으로 뽑혔고, 고려대의 경우 비운동권 후보가 세 팀이나 출마하는 등 전국 4년제 대학의 절반이 비운동권 학생회장 체제가 됐다.

손창일(27)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80년대 초반 민주화운동의 열풍에 휩쓸려 정치적인 색채를 띠었던 학생회가 2000년대 들어 학내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선거에서 이념 논쟁은 사라지고 복지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이들은 정치에 대한 욕구를 인터넷을 통한 참여로 분출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등 사이버 공간은 선거·정책·후보에 대한 정보가 교차하면서 정치교육의 온라인 학습장이 됐다. 이들은 대선 이벤트 참여를 높이기 위해 97년 대선보다 투표율을 0.1% 높이자는 취지의 '80.8%를 잡아라' 캠페인도 벌였다.

대학 문화의 산실이었던 동아리도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연세대 창업동아리인 연세벤처에 들어가려면 3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한다. 지원자는 "1억원으로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 등의 논술시험을 봐야 한다. 정회원으로 승격하려면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설명회까지 한다.

연세벤처 회원인 박상현(26)씨는 "현실 경제와 밀접한 유통·주식투자·창업동아리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운동권 성향의 동아리는 신입회원을 확보하기조차 쉽지 않다.

연세상경신문사 최용훈(22) 편집국장은 "학생들이 개인적·탈공동체적으로 변하면서 정치적 목소리를 냈던 동아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취업난도 하나의 이유"라고 분석했다.

서울대 홍두승 교수(사회학)는 "서울지역 대학생의 85%가 취업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고, 취업 공부에 하루 2.4시간을 쓰고 있다"면서 "'졸업장=취업'시대가 아니어서 학생들이 스스로 실력 배양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이원호·백성호·손해용 기자 llhl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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