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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못지킬 公約 털고가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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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부득이 세금을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 막대한 재정 적자를 줄여야 합니다. "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취임 후 한달도 안된 1993년 2월 15일 자신의 '감세' 공약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미 전역에 퍼져나간 라디오 방송 연설에서 클린턴은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대통령 선거 기간 중 "경기를 살리기 위해 중산층의 세 부담을 줄이겠다"며 유세장을 누볐던 그였다.

노태우(盧泰愚)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자신의 공약 4백59개를 수첩에 적어 가지고 다니며 늘 챙겼다. 임기 말에 盧전대통령은 "내가 손 못댄 것은 8개뿐"이라고 만족해 했다. 그러나 그의 공약 실천 사업 중 경부고속철과 새만금 사업은 지금도 초대형 골칫거리다.

누가 현명한 대통령일까.

중앙일보와 국가경영전략연구원은 새 대통령이 '공약 부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가칭 공약검증위원회를 만들어 버릴 공약과 고칠 공약을 추린 뒤 취임 전이라도 당선자가 국민 앞에 직접 나서 호소하는 것이 좋다는 방안도 제시됐다.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약 버리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나 그의 지지자들도 이제는 공약 중 무리하거나 불가능한 것이 많음을 인정해야 한다.

행정수도·국회 이전,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개정, 쌀 관세화 유예, 매년 7% 성장, 일자리 50만개 창출 등 대표적 공약부터 냉정히 들여다봐야 한다.

수도 이전은 모든 사회 비용을 따져보고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해야 할 대역사다. 국회 이전은 국회 몫이다. SOFA 개정은 상대가 있다. 또 미국이 전세계 82개국과 맺고 있는 같은 협정들과 비교해 우리만 다를 수 없다. 쌀 관세화 유예는 盧당선자 스스로도 중간에 말을 바꿨다. 일자리 50만개를 만들려면 매년 9∼10%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7% 성장만으로도 우리 경제는 부작용을 각오해야 한다.

또 누가 대통령이 되든 우리 예산 구조 상 대통령 의지로 쓸 수 있는 예산은 전체의 10%를 조금 넘을 뿐이다. 내년의 경우 약 11조원이다. 盧당선자의 공약을 예산으로 뒷받침하려면 11조원으로는 턱도 없다.

이런 지적들은 盧당선자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지자든 반대자든 당선 후 '공약 검증'은 선거기간 중 '공약 공방'과 달라야 함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강경식(姜慶植)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은 "공약에는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일들이 섞여 있다. 대통령 공약은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이 추진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해가 엇갈리는 부분에 대한 공약은 국회로 넘겨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 현실에서 공약 이행은 치적이 아니다. 외국도 마찬가지다. 공약에 집착하다가는 국정을 그르친다.

표를 노리고 무책임한 공약을 남발하는 것도 안되지만, '공약(空約)'을 지키라고 물고 늘어지는 것은 더 안된다. 언론·이익단체·지역주민 다 마찬가지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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