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짜리 1000년 느티나무, 서울살이 못 버티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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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 심은 1000년 묵은 느티나무가 거의 고사했다. 아파트 측은 나무를 살리기 위한 방책으로 고목의 구멍에 새 느티나무를 이식해 잔가지가 자라고 있다. [조용철 기자]

서울 서초구 반포의 한 아파트 단지. 어른 세 명이 양팔을 벌려도 감싸안기 힘든 오래된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지에는 연녹색 잎이 달려 있다. 하지만 한여름 고목의 연녹색 잎은 나무가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가는 표시라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아파트 경관을 위해 지난해 6월 경북 지역에서 옮겨졌다. 나무의 나이는 1000살가량 된다. 이후 고목(古木)은 낯선 서울 땅에서 투병생활을 했다. 시공사가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10억원에 사왔다는 ‘천년나무’는 아파트 단지를 대표하는 명물이었다. 그러나 이식된 뒤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모든 잎이 떨어지고 몸통에 뭉툭한 가지 몇 개만 남자 시공사는 지난해 11월 가림막을 설치해 특별 관리해왔다. <본지 2월 12일자 19면>

20일 찾아간 아파트 단지. 천년나무엔 가림막이 없었다. 키 4m, 지름 1.5m의 덩치에 비해 잎이 적어 보였지만 6개월 전보다 나은 상태였다. 주민 유모(69)씨는 “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잔가지들이 나는 것을 보니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해 7월 아파트 단지에 막 심어졌을 때 고목의 위용을 자랑하던 느티나무 모습.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나무는 어색한 모습이었다. 나무 자체에서 가지가 자라난 게 아닌, 나무 몸통 가운데 크게 난 구멍에서 잔가지들이 삐져 나와 있었다. 절단된 굵은 가지 가운데 난 구멍에서도 자라나온 잔가지들이 보였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측은 “올 초 거의 껍질만 남은 나무의 몸통 가운데에 새 느티나무 묘목을 심었다”고 설명했다. 나무의 수령(樹齡)이 많은 데다 이식 전부터 밑동에 큰 구멍이 난 상태여서 각종 치료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결과 “90% 고사한 상태”가 됐고, 최후의 치료법으로 새 느티나무 묘목을 안에 심은 것이다. 아파트 관계자는 “시간이 지나면 새 묘목이 천년나무와 합체해 천년나무의 생명을 연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천년나무에서도 몇 개의 가지가 자라나온 만큼 완전히 죽었다고 보기엔 이르다”고 덧붙였다.

산림과학원 박형순(조경수 담당) 박사에 따르면 이 방법은 ‘목부작(木附作·주로 생명이 다한 고목에 다른 나무나 꽃 등으로 장식하는 것)’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박 박사는 “훌륭한 나무가 죽어가는 것이 아까워 살아 있는 것처럼 멋지게 연출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또 “새 나무가 원래 나무의 썩은 뿌리를 빨아먹고, 파고들어 합체할 수 있지만 이는 새로운 개체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두 나무가 합체하더라도 기존의 천년나무로 볼 수 없어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상황을 눈치챈 일부 주민은 천년나무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한 주민은 “빈 공간에 어린 나무를 이식한 것을 천년나무로 보기 어렵지 않느냐”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시공사 측이) 자꾸 뭔가 꾸미려 하지 말고 입주민들에게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했으면 좋겠다’고 아파트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적었다. 박 박사는 “고향에 있었으면 멋진 골동품이 됐을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글=송지혜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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