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 적십자회담 '잘못된 擇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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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측이 이번 대선을 무척 의식하는 것 같습네다. "

금강산에서 17일 끝난 2차 적십자 실무접촉에 참여한 북측 관계자는 남측 공동취재단 소속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북측에 이런 인상을 갖도록 했을까.

대통령 선거 며칠을 앞두고 열린 이번 적십자 회담은 준비나 진행과정에서 미흡한 점들이 적지 않았다.

북측의 회담 개최 제안에 정부와 한적(韓赤) 실무자들은 "대선에 임박한 시점이라 부담스럽다"며 선거 이후로 늦추는 쪽으로 수정제안해야 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래도 한번 해보자"는 고위층의 기류에 떠밀려 대표단은 금강산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해야 했다.

예상대로 16일 첫 회담부터 두터운 벽에 부닥쳤다.

우선 내년 설(2월 1일)에 맞춰 이산상봉 행사를 갖는다는 데는 원칙적으로 합의하고도 면회소 문제를 둘러싸고 엄청난 입장차가 드러났다.

객실 1백30개에 연건평 2천3백평 규모면 충분할 것이란 우리 생각과 달리 북한은 무려 2만평의 건평을 요구했다. 북측이 자랑하는 금강산 여관(4천4백평)의 다섯배 가까운 데다 공사비만 2천억원이 드는 시설이다.

게다가 북한은 남측이 지원키로 한 면회소 건설 자재가 금강산에 들어와야 추가 상봉을 할 수 있다고 끝까지 버텼다.

그렇지만 면회소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북측이 추가 상봉에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부 당국자들은 막판에 "설 상봉에 원칙적으로 합의를 봤다"며 공동보도문까지 내놓았다. 아무 성과가 없는데도 의연하게 돌아서지 못하고 "공동보도문이라도 만들자"고 북측에 매달리는 태도를 보인 것도 볼썽 사납다.

인도적 사안인 이산가족 문제를 '민감한 시기'에 다루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모양새 갖추기에만 급급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양측은 지난 10월 1차 회담에서도 '연내 추가 상봉'에 합의했지만 결국 면회소 문제에 걸려 없던 일로 해버렸다. 결과적으로 남북한 모두 아무런 입장변화도 없는 상황에서 '혹시나'하고 부닥쳐 본 셈이다.

회담이야 다시 한다지만 내년 설날에는 혹시 꿈에 그리던 가족과 만날까 한껏 부풀었던 이산가족들의 세모(歲暮)는 더욱 썰렁하게 됐다.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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