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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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계화는 과거 어느 시기보다 전쟁을 억제하고 전쟁 비용을 증대시킨다."

뉴욕 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베스트 셀러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 나오는 말이다. 프리드먼은 자신의 주장을 이른바 '골든 아치(golden arch) 이론'으로 정리했다. 황금빛 엠(M)자형 아치로 유명한 맥도널드 체인점이 있는 나라들간에는 전쟁이 없다는 주장이다. 맥도널드를 즐길 정도로 의식이나 생활수준이 국제화된 나라들은 전쟁의 무모함과 비합리성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설사 전쟁이 터져도 경제력이 승부를 가른다는 이론과도 맥을 같이 한다. 미국의 저명한 사학자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유럽 또는 전세계에서 벌어진 주요 동맹전쟁에서 승리는 항상 왕성한 생산기반을 가진 편에 돌아갔다"고 썼다. 1,2차 세계대전이나 미국의 남북전쟁·한국전쟁·걸프전쟁 등이 좋은 예다.

그러나 현실은 프리드먼이나 케네디의 이론과 다소 거리가 있다. '골든 아치 이론'은 1999년 발간된 지 두달 만에 미국과 맥도널드 체인점이 성업 중인 유고연방 간에 전쟁이 터지면서 빛을 잃었다. 지난해 9·11테러 이후에는 맥도널드사 스스로가 중동 등 10개국 1백75개 점포 철수방침을 발표했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니알 퍼거슨은 경제적 합리성이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프리드먼식의 주장을 '평화의 환상'이라고 지적했다.(『현금의 지배』, 김영사) . 경제적 비용이나 격차가 무서워 전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일본처럼 전쟁의 이익은 집권층이 차지하고 희생은 힘 없는 백성들의 몫인 비민주국가일수록 전쟁은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막바지로 치닫는 대선 정국에 북한의 핵 동결 해제선언이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이에따라 한반도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핵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이나 비민주국가인 북한이 전쟁을 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핵(北核)은 언론과 대선 메뉴로만 오르내릴 뿐 시민들의 일상에는 별다른 긴장감을 주지 못하는 양상이다. 워낙 단련이 돼서 그런 것일까. 혹시 우리가 '평화의 환상'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닐까. 북한에는 그나마 맥도널드조차 없는데.

손병수 중앙일보 포브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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