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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슬픔 다독거려준 케루악 『노상에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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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면

나는 아주 성질이 나쁜, 항상 불만에 찬 아이였다. 맘에 차지 않으면 먹지도 입지도 않았다. 어른들이 아무리 잘해주어도 고마워 하기는 커녕 불평을 해대는 그런 아이였다. 어디서든 만족을 찾지 못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성격이 확 바뀌었다. 조용해졌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책만 읽었다. 인생살이를 포기한 듯이 보였다. 상상의 세계로 얼이 다 날아간 듯이 보였다. 그것이 열두어살 적 일이었다.

사춘기를 지나 질풍노도의 청춘을 넘기면서 감정처리를 완전히 책에 의존했다. 자기가 자신을 가누지 못한다고 느낄 때는 책을 펴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맨 첫 장부터 읽는 것이 아니었다. 잡히는 대로 아무데나 펴서 읽기 시작했다. 나의 거처에는 하도 읽어서 낱장들이 너덜너덜해지고 두꺼운 겉껍질조차 날아가 버린 책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원인도 모르는 슬픔에 잠겨 황량한 들판에 멍청히 서있는 청년 토니오 크뢰거, 나는 토머스 만의 동명소설(민음사) 주인공인 그를 통해 황야의 삭풍을 온몸으로 느낀다. 나의 원인 모르는 슬픔이 그의 슬픔을 구경하는 동안 잦아든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음향과 분노』(민족문화사)에서 생울타리 주변을 웅얼거리며 맴돌고 있는 벤지를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불분명한 울분에 잠겨있는 나의 의식은 벤지 수준의 미숙아로 내려가서 생울타리 주변을 빙빙 돌고 있다. 얼마간 그렇게 헤매고 나면 나의 머릿속은 단순하게 정리되어있다. 내용도 없는 말들을 열에 들 떠 쉬지 않고 지껄여대는 잭 케루악 소설 『노상에서』 속의 젊은이들. 그들은 움직이는 차안에서 하이웨이를 달리면서 집단으로 청춘을 삭이고 있었다. 나는 도서관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서, 그들을 읽어대면서, 혼자 청춘을 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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