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北風, 집권당에 선거 승리 안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87년 12월. 대선을 불과 17일 앞두고 1백15명의 인명을 앗아간 KAL기 공중폭파 사건이 정치권을 강타했다.

폭파범 김현희(金賢姬·일명 마유미)는 바로 선거 전날 바레인에서 서울로 압송됐다. 노태우(盧泰愚)·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후보가 각축을 벌이던 대선 판세는 집권 민정당의 盧후보 쪽으로 굳어졌다. 이른바 '북풍'(北風·북한 변수가 미치는 영향)의 효시다.

5년 뒤 14대 대선 때는 구속자 64명, 수배자가 3백여명에 이르는 '남한조선노동당' 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선거 두 달 전 안기부가 "'북한 권력서열 22위'라는 공작총책 이선실(李善實)이 10여년간 남한에서 활보하며 재야인사·현역정치인 등을 포섭해 대남 공작을 지휘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구속자 가운데는 DJ의 비서 이근희씨가 포함됐다. DJ는 낙선했다.

96년에는 15대 총선 투표일을 일주일 남겨두고 북한이 갑자기 정전(停戰)협정 파기를 선언하고, 사흘 동안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에 무장병력의 시위를 벌였다. 결과는 여당이던 신한국당의 승리. 신한국당이 1백30석을 얻은 데 비해 국민회의는 79석에 불과했다.

이듬해 97년 대선 때도 어김없이 북풍이 불었다. 월북한 오익제(吳益濟)전 천도교 교령이 투표일을 불과 2주 앞두고 '김대중 후보 지지'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대선 판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권교체 후 실시된 2000년 4·13 총선 3일 전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를 전격 발표했다. 남북 간 긴장을 조성한 과거 방식과는 정반대다. 하지만 총선 결과는 야당인 한나라당의 승리였다. 역시 북풍이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한 선거였다.

97년 이후엔 북풍의 방향이 바뀌기도 하고, 득표율과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민석 기자

mska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