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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스님/칼럼』 공존의 미학-3,'작은 인연’이라도 소중히 여겨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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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무위복승분 <제 11장>을 보면, 부처님은 항하(갠지스강)의 모래를 가리켜 우리의 ‘인연’을 비유했다고 한다. 어느 날 부처님이 항하를 가르키며 제자들에게 물었다. “손으로 쥐어 그 손에 쥔 모래알갱이의 수가 몇 개 인가?” 라고. 이에 그의 제자들이 답하길 “손에 쥔 모래알갱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또다시 제자들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항하의 모래알갱이의 숫자는 어떠하겠는가?” 제자들이 답하기를 “손에 있는 모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찌 항하의 모래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제 서야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하길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조건 또한 이처럼 헤아릴 수 없으니 인연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라고 말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즉 제아무리 작은 인연이라도 소중히 여겨야하며,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인연이란 1겁에서 1만겁의 시간을 지나 이어진 일기일회(一期一回)라고 하여 평생의 단 한 번의 만남이자 내생에 단 한번뿐인 일이기에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친 인연이라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다.

세상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의 법칙에 의해 서로 연결돼 있으며, 어떤 존재도 우연히 혹은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도 어쩔 수 없이 조건화된 삶의 토대 위에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 뿌린 업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존재나 행위에는 반드시 그 원인과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며, 자신이 뿌린 것은 자신이 거둔다는 인과의 진리를 통해 영혼이 메말라가는 현대인들에게 지금 이순간 자신의 행동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무상하여 언제나 생멸변화 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궤도 안에서 일정한 움직임을 하고 있다. 그 움직임의 법칙을 인연생기라고 한다. ‘인연생기’를 줄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연’ 또는 ‘연기’라고 한다.

즉 물이 있기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남자가 있기에 여자가 있고, 여자가 있기에 생명이 잉태되는 것처럼. 일정한 법칙에 의해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사물의 생멸 변화에는 인연화합의 조건이 그리고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이 만들어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불교에서 일컫는 인연이라 함은, 쉽게 스쳐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백천만겁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흘러야 만날 수 있다. 그만큼 만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즉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인연의 생도 만찬가지다. 부모의 인연으로 태어났으나, 끝까지 다하고 가지 못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우리는 부모에 의해서 쉽게 태어난다고 하지만 부모의 인연은 어렵다. 부모의 인연으로 태어나려면 우선 세 가지 화합이 맞아야 한다. /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시에 음욕을 일으켜 함께 어울릴 때. 또한 어머니의 몸이 쾌적하여 병이 없어야 한다. / 음욕을 일으킬 대 몸과 마음이 쾌적하여 어머니 배속에 풍이나 담이 열이 없는 것을 병이 없어야한다 ./ 어머니가 뒤를 볼 때에 핏물이 끊이지 않거나 물이 너무 흘러 서 너무 습하거나 건조하여도 태를 이루지 못 한다. / 월수가 많아도 적지도 않고, 습하지 않아야 비로소 태를 이룰 수 있다.” 이런 한 시기를 불교용어로 “ 이 때„ 라고 한다.

그리하여 중류가 태에 들아 갈 때는 어머니의 마지막 피에서 나머지 한 방울과 아버지의 마지막 정액에서 나머지 한 방울이 화합해서 한 생명이 태어나게 된다. 태어남의 소중한 생명 속에 부모에 의해 받아지는 한 몸뚱이는 오장육보로 더러운 몸을 가지고 있으나, 아기는 어머니 태내에서 깨끗한 아기 주머니 속에서 자란다. 더러운 연못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듯이, 우리의 생명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더러움을 모른 채,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피어나는 생명의 꽃이니,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의 탄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삶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생명. 그 인연에 주었기에 물을 주고, 어머니의 가슴에 품어, 젖을 주어 부모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부부인연도 마찬가지다. 부부란 결혼하여 같이 사는 것이다. 결혼식을 하면, 여러 하객들 앞에서 맹세를 하고 축하를 받는다. 축하 속에 우리는 부부의 인연을 선포하고, 합방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즉 둘의 인연을 하나로 맺게 하여주는 것이다. 한마음이 되어 함께 묶여 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험한 세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의미다. 그래서 결혼식 날을 받는 것도 여자의 월경을 따져서 정 한다. 첫날 합방에 좋은 날을 잡아 아이를 갖게 하기 위해서다. 이렇듯 좋은 날에 아이를 가지면 똑똑한 아이가 태어나기 때문에 옛날부터 합방하는 날에는 날을 정하여 아기의 생명을 잉태했다.

그러나 작금의 시대는 어떤가. 택일도 받기 전에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만남의 인연을 멀리 한 채 이미 깨어지는 커플들이 많다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부부의 인연으로 맺어지지 결혼이 아니면 불륜이 되고, 살기가 싫어 죽도록 미워도 결혼은 합방해야 되고 따로 자면 불행이라 한다. 이처럼 인연 즉 만남의 결합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연법에 대한 재미있는 글이 생각난다. 부처님 생존 당시, 한 여자 어린아이가 태어났다. 그 모습이 너무 예쁜 나머지 태어난 아이를 보더니 왕이 고하기를...... 요즘말로 찜하였다. 이윽고 왕은 그 아이의 운명을 알고 싶어 관상을 보게 하였다. 관상보는 사람이 말하길 “이 아이는 폐하의 배필이 될 수 없으며, 그 인연은 따로 있습니다.”
밤낮을 고민한 끝에 왕은 아이와 유모를 아무도 없는 산속 깊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보냈고 그 아이만을 잘 자라게 하였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성숙했고 그 아이는 어느 덧 어여쁜 아가씨로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사냥을 나온 한 사냥꾼이 나무위에 올라가 보니 깊은 산골에 어여쁜 아가씨가 사는 것을 보고는 밤에 몰래 들어가 행위를 범했다. 그렇게 사냥꾼과 어여쁜 아가씨는 첫날밤을 보냈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윽고 왕에게 불려 갔으나 사형을 면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자신의 인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왕이 그들을 보내준 것이다. 이는 불교의 가르침 중 하나로 인연법에 대한 이야기다. 즉 우연 한 인연도 있지만 과거 생부터 주어진 필연적인 인연의 만남도 있음을 깨우쳐 준다.

이처럼 세상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의 법칙에 의해 서로 연결돼 있으며, 어떤 존재도 우연히 혹은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도 어쩔 수 없이 조건화된 삶의 토대 위에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 뿌린 업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존재나 행위에는 반드시 그 원인과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며 자신이 뿌린 것은 자신이 거둔다는 인과의 진리를 통해 영혼이 메말라가는 현대인들에게 지금 이순간 자신의 행동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다.

지난주 신도님과 함께 부부 동반하여 함께 봉정암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부부들을 보며, 한 부부는 남편이 환자라 10년을 투병생활을 했었던 지라, 부인이 애지중지 하여 다시 생명을 얻어 힘든 산행을 하는데, 남편이 아닌 자식처럼 따라다니면서 그 무거운 짐을 들어가면서 시봉하는 모습, 또 다른 부부는 부인이 몸이 약간 뚱뚱하여 일행을 따라가지 못하니, 산행하는 사람들은 물을 많이 먹기 때문에 산행이 몇 배로 힘들다면서 물을 대신 들어주고, 손을 잡고, 끌어 올리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문득 “서로를 아껴주고, 희생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에 작은 행복의 만남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어렵게 주어진 생명을 소홀히 생각 하고, 가볍게 여겨, 낙태를 선택한다. 상담하면서 가장 무서운 것은 결혼 전 낙태를 하여 막상 결혼하여 아이를 갖고 싶은데, 아이가 유산되어 갖지 못하는 경우다. 우리는 흔히, 유산은 스스로 죽어서 나오기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낙태보다 더 무서운 죄악이 바로 유산이다.

부처님말씀에도 있듯이 아이가 유산이 되어 나오는 것은 낙태를 하거나 부모로 인하여 많은 낙태를 하고 남에게 낙태를 권유할 때, 그 악연의 인연으로 아이 태어나지 못하고 죽어서 태어나 원결을 주는 것이라 한다. 이처럼 한 생명이 주어진 것이 얼마나 많은 인연 속에 생기고 시간을 거슬러 부모의 화합에 의해서 생기는 생명인가, 우리가 꽃을 사랑하듯, 애인을 사랑하듯 나에게 생기 생명을 낙태 하지 말고,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낙태는 내 자신이 살생을 하는 죄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구담사에서는 매년 3.6.9.월이면 낙태가 생명인줄 모르고 지워버린 아이에게 지은 죄를 참회하기 위해 엄마. 아빠가 몇 백 명이 모여 문정성시를 이루는 가운데 기도를 한다. “‘미안하다’고......”. 이는 우리나라 뿐 만이 아닌, 일본에서도 태아도량 입구에 가보면, ‘이 세상에 태어나려고 했으나, 태어날 수 없는 아가들에게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와 똑같은 생명’이라 하여 참회한다고 한다.

한편 낙태천국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바로 결국 우리 자신이란 얘기다. 우리는 작금의 현실의 심각성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 깊은 강물일수록 소리 없이 흐르듯, 또 그 강물들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하나가 되어 시련을 막아야 한다.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도와주는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힘들고 괴로운 자를 보고도 '나 몰라' 하는 자가 어찌 잘살고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자비심을 갖고 항상 이웃을 바라보고 도울 때 비로소 나에게도 자비가 돌아오는 것이다. 자비는 바다와 같다. 바다와 같은 큰마음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수행하다 보면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잘살 수 있게 됨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한 마디는 결론적으로 바람으로 하여금 머리카락이 움직여 몸이 바람임을 느끼게 하고, 나뭇가지 흔들리며 소리를 내다가 나뭇잎이 떨어져 낙엽이 되어 뒹구니 바람을 느낄 수 있지만, 바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확인 할 수 없는 것을 인연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중생끼리 우연히 눈이 마주치듯. 오늘의 인이 내일의 연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다가오는 인연을 위해 하루하루 좋은 인연을 맺기를 바라며, 모두가 제아무리 작은 인연이라도 소중히 여겨 참된 깨달음을 얻기를 염원해 본다.

출처: 구담사 / 지율스님

<본 자료는 정보제공을 위한 보도 자료입니다.>

조인스닷컴(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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