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토론 운영의 묘 살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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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민주주의란 정말 좋은 것이다. 현 세대(世代)의 복지는 물론이려니와 후세의 삶의 질에까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국가 지도자를 국민 스스로의 손으로 뽑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에 윈스턴 처칠경은 민주주의가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지만 인류가 지금까지 시험해본 어떤 정부 형태보다 나은 것이라고 한 것이리라.

이러한 민주주의도 국민들이 시대 여건에 맞는 바람직스러운 리더십을 발휘해 줄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을 때 그 진가가 더욱 잘 나타날 것임은 자명하다. 따라서 국가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후보들의 자질과 잠재 리더십을 가름할 수 있는 기회를 국민들에게 최대한 부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필자는 대선 후보들의 TV토론 시간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본 칼럼 8월 16일자). 심도 있는 대선 후보 TV토론회는 후보들의 자질 검증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각 후보들이 직접 국민 앞에서 국가경영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 구체적 실천방안에 관한 공약(公約)을 하게 함으로써 당선 후에 올바른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강요하는 기능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하는 사람들은 "강이 없는 곳에도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미국의 경우에도 세금을 절대로 올리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한 후보가 대통령 당선 후 얼마 되지 않아 증세를 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유들도 있었지만 그는 재선에 실패했다. 어쨌든 온 국민이 지켜보는 TV 앞에서 직접 공약한 것을 공약(空約)으로 돌리기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난주에 있었던 첫번째 대선 후보 TV 합동토론회에 관한 여러가지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그 비판의 소리는 주로 단문단답(短問短答)식 토론 절차가 기계적으로 진행됨에 따른 문제와 3자 토론방식의 한계에 집중된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당선 가능한 2자간의 심도 있는 반론과 재반론 형식으로 융통성 있게 진행되지 못해 국민들의 관심을 그 만큼 떨어뜨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후보들의 자질검증과 차별화에 미흡했다는 아쉬움의 소리였다.

그러나 필자가 더욱 아쉬워한 것은 정치·외교·안보 등 관련 분야의 중요 정책 어젠다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미흡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정치개혁이란 주제와 관련해 당장 국가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거의 매년 치르게 되는 각종 선거 사이클의 조정 방안, 돈 안드는 선거와 선거 공영제 실시 방안, 그리고 선거구 조정 등 국회의원 선거관련법 개정 문제에 관한 심도 있는 의견 개진과 공약을 얻어낼 수 있는 시간은 갖지 못했다. 외교·안보분야에서도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적 반미주의 확산 문제, 그리고 좀 더 긴 안목에서 본 한반도 주변국가와의 관계 및 동북아 지역에서의 우리의 역할과 위상 정립 등에 관한 논의와 비전 제시는 미흡했다. 이는 적절한 토론 주제 선정을 위해 분야별 국가 정책 어젠다와 그 우선 순위에 관한 전문가들의 중지를 모으는 일이 중요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경제 및 문화·사회 분야 TV토론회는 이미 결정된 원칙 내에서라도 그 운영의 묘를 최대한 살려 TV토론 본래 취지에 맞게 진행돼야 할 것이다.

우선 분야별 주요 정책 이슈들을 골라 그 우선 순위에 따라 심도 있게 토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각 후보에게 공평하게 배분된 시간 내에서의 이슈별 토론과 질의 시간은 각 후보가 융통성 있게 조정해 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즉 각 후보가 중요하다고 우선 순위를 두는 분야에는 더 많은 시간을 쓰게 허용하되 그 대신 다른 분야에 관한 시간은 그 만큼 줄이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앞으로 남은 토론회에서도 3자 토론 형식을 바꿀 수 없다면 가능한 한 주요 이슈별로 1대 1의 토론 시간을 더 많이 갖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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