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사회주의와 아이스크림 튀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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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동운동사가 전공인 만프레드 샤러는 바덴주의 노동조합 교육위원회에서 일한다. 사람 좋아 뵈는 선한 웃음이 인상적인 샤러를 처음 만난 것은 보쿰에서 열린 로자 룩셈부르크 학회에서였다.

이미 다른 독일 친구한테 그의 발표가 흥미있을 거라는 귀띔을 받은 터여서 자꾸 눈길이 갔다. 그는 지난 7월 베를린에서 『자유는 항상…(Freiheit ist immer…)』이라는 얇지만 도발적인 책을 출판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의 전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의 의도는 한 마디로 '탈신화화'다.

사회주의 혁명의 길에서 영웅적으로 순교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는 그 죽음만으로도 충분히 신화화의 소지를 안고 있다. 독일 사회민주당 주류의 개량주의적 성향과 러시아 볼셰비즘의 비민주주의적 경향을 함께 비판한 보기 드문 사상적 자산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러하다. 68세대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서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볼셰비즘의 역사적 한계를 동시에 넘어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제3의 길을 발견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일찍부터 국내에 번역 출간된 프뢸리히의 고전적 룩셈부르크 전기나 최근 번역된 막스 갈로의 룩셈부르크 평전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맥락에 서 있다. 이 평전들에 비하면, 샤러의 비판은 신랄하기 짝이 없다. 그의 텍스트 분석에 따르면,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쟁적 글 쓰기는 상대방의 명예에 흠집을 내고 인격을 모독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로자의 글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수사는 화려하지만 내용은 공허하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첨예한 쟁점에 다다르면, 로자의 논리는 자주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억압성을 드러낸다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

물론 그의 비판은 글의 형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권력쟁취의 수단으로 생각했다든지 대중의 창발성 이론조차 당의 지도부가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을 때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한 이론적 지렛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로자의 대중관 혹은 프롤레타리아관은 그들의 삶의 현실을 반영하기보다 로자의 희망사항을 투영한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화 벗기기의 의도를 감안한다 해도, 샤러의 비판은 때때로 지나치게 나간 점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샤러의 비판은 경청할 만하다. 같은 로자 룩셈부르크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 논문도 실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룩셈부르크의 신화화된 대중관, 유럽중심주의, 남성노동자 중심주의 등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것이었고, 그 점에서 샤러의 비판과 공유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샤러의 입장은 수긍하기 힘들다.

이 대목에서 샤러는 룩셈부르크를 비판하는 대가로 독일 사회민주당의 주류인 샤이데만과 에버트 등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드러낸다. 현재주의의 관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판한다고 해서 샤이데만 등의 독일 민족주의에 오염된 사민당 주류가 자동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 서면, 이들 주류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더 신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누가 더 정당한가의 논의가 아니라 '민주적 사회주의'의 가능성이다. 폴란드의 망명객 옥스퍼드 철학자 레제크 코와코프스키는 그것의 현실성을 '튀긴 눈덩이'라는 모순과 같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 비유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샤러에게, 그러나 나는 어느 낯선 곳의 식당에서 호기심으로 먹어 본 '아이스크림 튀김'이라는 디저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코와코프스키는 아마도 그것을 먹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라고….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비판은 '아이스크림 튀김'을 만들려는 노력이 전제될 때, 그 진정성이 있는 것이 아니겠냐는 내 설명에 샤러는 종내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옆에 있던 니시카와 마사오 교수가 오히려 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한마디 거든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한 주류 우파의 악마론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우파의 악마론을 정당화시켜준다는 단순논리가 지배적인 한국의 상황에서, 좌파에 대한 좌파의 비판이 설 자리는 어디일까? 어디 '아이스크림 튀김' 맛있게 하는 집 없나?

<한양대 사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방문학자 겸 영국 글래모건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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