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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과 광복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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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5년 새해가 벌써 한달 가까이 흘렀다. 많은 나라, 민족들이 새해를 맞아 나름대로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한다. 국가적 캠페인을 펼치기 위한 새로운 화두(話頭)도 만들어낸다. 한반도 주변국들도 예외는 아니다.

새해 들어 일본엔 종전(終戰) 60주년의 의미가 넘쳐난다. '종전체제의 종언'을 이룩하자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이러한 담론에는 일본의 적극적 국제역할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군비확충을 통한 군사대국화 등 우익화의 논리가 끼어있다. 일본이 '종전'을 강조하는 것은 2차대전 전범국가로서의 '패전' 사실을 회피하고자 하는 심정 때문이다. 일본의 패전의식 상실은 탓할 일이 못 된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 도발국의 책임과 반성을 의도적으로 실종시킨다면 이는 문제다.

일본이 패전이란 단어를 숨긴 채 종전을 강조한다고 해서 전쟁의 기억이 당사자 모두에게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 종전이란 단어를 앞세운 채 미래로 내달리고 싶다 해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위선적 태도와 일본우익과 일부 정치지도자들의 끊임없는 반역사적 태도가 상기시키는 전범국가로서의 이미지가 주변국 국민의 기억에서 없어지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일본이 강조하는 종전은 일본 열도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넘어가도 의미가 확 달라진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국 중 나치의 심장부인 베를린에 최초로 입성했고 사할린과 북한 땅에 최초로 군대를 진주시킨 러시아는 종전(終戰)이란 단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승전(勝戰)의 의미를 한껏 강조한다. 특히 올해는 2차대전 전승 60주년이 되는 해라 기념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린다. 지난해 노르망디 상륙작전 행사에서 전승국이자 2차대전 최대의 희생국이었던 러시아의 역할이 세계적으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데 대한 반작용이다.

일본과 러시아가 동북아 지역에서 승전과 패전의 당사자였다면 일본 제국주의 전쟁의 가장 큰 피해 당사자였던 중국과 남북한은 과연 2005년을 어떻게 의미부여하고 있을까. 중국에선 올해 역사적으로 특별히 강조하는 화두가 없다. 반면 국가지도자나 지식계는 모두 '안정적 발전'을 강조한다. 중국은 성장하는 국력에 취해 의식적으로 과거의 슬픈 상처에 대한 언급을 필요할 때 외에는 꺼내지 않는다. 대신 이제는 국제사회에서의 지속적 역할을 고수하기 위한 방책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

반면 한국은 2005년 들어 광복 60년, 한.일 국교수립 40주년, 을사조약 100년 등을 강조한다. 중국은 의식적으로 일제의 기억을 최대한 적게 언급하고 한국은 2005년의 의미를 지나치게 일본과 결부시켜 받아들이는 듯한 느낌이다. 패전을 밀어내려는 일본의 종전의식이나, 승전의식에 도취하려는 러시아, 그리고 의식적으로 이를 언급 않으려는 중국, 국토의 반을 통일하지 못한 채 광복을 강조하는 한국의 모습은 동북아국가들 모두가 아직도 전쟁의 상흔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2005년의 의미를 국제사회에서는 물리에서 찾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적 주요 업적들이 100년 전인 1905년에 발표됐기 때문이다. 2005년 동북아 지역에서 종전과 승전, 패전, 광복과 분단의 의미가 겹쳐지고 강조점이 달라지는 것도 정치와 역사 영역에서의 상대성 이론의 적용으로 보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것은 통일장 이론 때문이기도 함을 염두에 둔다면 동북아 화해 프로젝트와 협력의 기운이 싹트는 해로 2005년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마침 2005년 한국에선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전 세계 주요국 정상들이 모두 한반도에 모여드는 올해엔 남북문제뿐 아니라 동북아 지역에 화해와 협력의 큰 진전이 있어 분단국가인 한국이 동북아 화해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는 원년이 됐으면 한다.

김석환 논설위원